전 세계 정치 지도자와 억만장자들이 탈세를 위해 조세 회피처에 거액을 숨겨놓았다는 내용의 '판도라 페이퍼스'가 공개된 데 이어 이들이 조세 회피처를 부정 축재를 위한 강력범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실태 고발도 나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6년간 해외 조세회피처에 투자된 금액이 세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판도라 페이퍼스'에 포함된 부호들을 분석한 결과 10여명이 소득원과 관련해 범죄 정황이 있거나 이미 처벌됐다. 이들은 저개발국에서 자금이나 천연자원을 헐값에 채굴하는 사실상 약탈에 조세회피처에 있는 유령회사를 동원했다.
유령회사는 신흥국이나 저개발국 독재자들과 유착하는 데 필요한 뇌물을 몰래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WP는 나이지리아 석유 재벌 3명의 사례를 들었다. 미국 법원 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나이지리아 석유장관의 환심을 얻을 때 현금을 주지 않았다. 대신 유령회사를 통해 장관 가족들에게 운전사가 딸린 승용차를 제공하고 장관에게 명품 가구를 전달했다. 미국 검찰은 이들이 수익성이 높은 사업 기회를 얻는 대가로 석유장관에게 준 선물이 수백만 달러(한화 수십억원)라고 지적했다. 뇌물수수를 추적당하지 않을 고전적 수단은 현금이지만 꼭대기에 있는 극소수 부호들은 조세회피처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부호들이 저개발국에서 천연자원을 약탈해 부를 해외로 빼돌리는 데에도 조세회피처 유령회사들이 동원됐다. 스위스 법원 문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다이아몬드 거래상인 베니 스테인메츠는 뇌물 1000만 달러(약 120억원) 주고 기니에서 철광석 개발권을 얻어냈다. 뇌물수수를 감추는 데는 이번에도 조세회피처에 설립된 유령업체가 이용됐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 광산업자 댄 커틀러도 유령업체를 통해 민주콩고에서 광산 개발권을 부정하게 얻은 뒤 2010∼2012년에만 13억 달러(약 1조5000억원)를 가져갔다. 또한 조세회피처에 있는 유령회사들은 슈퍼리치들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도 이용됐다. WP는 수백만명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지만 억만장자들은 부를 숨겨 사회적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고 신흥국들을 주목했다.
경제잡지 포브스의 억만장자 목록에 오른 인도네시아 개인 또는 가문 31곳 중 10곳이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소유했다. 태국에서도 억만장자 개인이나 가족 34명 가운데 8명이 유령업체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비영리 조사단체인 국제금융건전성기구(GFI)의 톰 카더몬 회장은 "유령업체는 투명망토"라며 "어떤 종류의 정부 당국 시야에서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내에서도 지난 6년간 해외 조세회피처로 투자된 금액이 세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주장이 나왔다. 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한국수출입은행과 국세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조세회피처 35곳에 대한 투자액이 162억9000만달러였던 반면 국세청의 역외탈세 적발액수는 11억5000만달러(1조2837억원)로 투자 총액 대비 8.2%에 그쳤다.
용 의원에 따르면 조세회피처 투자는 2015년 63억달러에서 5년 사이 2.6배가 늘었다. 전체 해외투자에서 조세회피처 투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20.6%에서 28.7%로 상승했고, 신규설립법인 수도 265곳에서 385곳으로 1.5배 늘었다.
반면 국세청이 역외탈세 세무조사를 통해 부과한 세액은 5년 전과 지난해 큰 차이가 없었다. 2015년에는 1조2861억원이었던 데 비해 지난해 1조2837억원으로 원화 기준으로는 오히려 소폭 감소했다. 용 의원은 "최근 공개된 판도라 페이퍼스에서 보듯 글로벌 엘리트들이 조세회피나 탈세를 시도하고 있다"며 "국세청은 금융법인과 공공법인의 역외탈세를 눈여겨보고, 탈세 추적의 고도화를 실적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세계 각지의 정치지도자, 억만장자 수맥명이 조세회피처에 거액을 숨겨놓고 있다는 내용을 폭로 보고서 '판도라 페이퍼스'를 지난 3일 공개했다. 세계 117개국 159개 매체에서 언론인 600여명이 참여한 이번 프로젝트는 기득권층이 은폐한 부정부패를 탐사하자는 취지에서 진행됐다. 김광태기자 ktkim@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