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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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빈들서 마침내 고국으로
독립군 이끌고 봉오동 전투서 승전보
민중의 영웅이었지만 우리는 잘 몰라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 알리기 필요

중앙아시아 빈들에 잠들었던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마침내 지난 8월 15일 고국강토에 돌아왔다. 조국을 떠난지 100여년 만이다. 홍 장군은 김일성의 항일 행적과 비교된다는 이유로 북측에선 주목받지 못했고, 남쪽에선 반공을 이유로 배척당한 경계인이었다. 홍 장군은 당시 민중들의 희망이자 영웅이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100년 전 신문기사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하늘을 나는' 홍범도를 기억해 보자.

1911년 5월 3일자 신한민보에 '의병접전'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한성 3월 22일자 통신에 의한 즉,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에 있는 한인 홍범도 씨의 부하 1000여 명은 훈춘을 지나 내지로 향한다는 탐보(探報)가 있더니, 지난 17일에 의병 50여명이 25명씩 길을 나누어 1대(隊)는 밀점 방면으로부터 경흥으로 오는 길에 왜(倭) 헌병을 만나 대충돌하다가 의병 5명이 전사하고 1명은 중상하였는데, (중략) 그들은 백두산에 근거지를 정하고 동지를 모아서 서울을 들이칠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더라."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고 그 후 신문에는 지속적으로 봉오동 전투에 대한 기사가 실리고 있다. 국내에서 발간된 신문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에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1920년 7월 29일자 신한민보에는 '독립군 승첩, 봉오동에서 원수를 대파, 원수는 사상자가 120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6월 7일 하오 7시에 북간도에 주둔한 우리 독립군 700명이 북로사령부 소재지인 왕청현 봉오동을 향하여 행군할 때, 뜻밖에 적군 300명을 만난지라 독립군을 지휘하는 홍범도, 최진동(崔振東) 두 장군은 즉시 원수를 공격하였는데, 왜군의 죽은 자가 120명이라, 왜군이 도주함으로 인하여 즉시 뒤를 따라 전투 중에 있다."

같은 해 9월 16일자 신한민보에는 '우리 독립군의 대승첩'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6월 7일 오전 7시경에 북간도에 주둔한 우리 독립군 700여명이, 북로사령부 소재지인 왕청현 봉오동으로 향하여 행군할 때, 불의에 적군 300여 명이 또한 봉오동으로 직행하는지라, 홍범도, 최명록(최진동의 또 다른 이름) 두 장군이 도중에서 돌연히 급사격으로 원수로 접전한 결과, 적군의 죽은 자가 120여명이라, 지금 전쟁 중이므로 최후 승리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일간 다시 상보(詳報)한다."

1921년 2월 10일자 신한민보에 다시 봉오동 전투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원수는 봉오동을 아군의 책원지(策源地)라 하여 포위공격을 하려 하고, 원수의 보병 약 1대대는 고려령 방면으로 전진 중이며, 따라서 아군은 작전계획을 아래와 같이 했다. 제1연대를 봉오동 상촌 부근에 있는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내려 각 부대의 전투 구역과 그 임무를 정할 때에,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견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동북단에 점위(占位; 어떤 지위를 차지함)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를 하였다가 (중략) 원수와 우리의 손해를 보면 적군 사상자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요, 우리의 죽은 자는 장교 1인과 병사 3인, 중상자 2인이며, 저 원수의 버린 물건은 많이 있었다."

1920년 11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홍범도 장군은 위험을 피해 '최충호'라고 변명(變名; 이름을 바꿈)까지 해 가며 일본과 중국 관헌의 눈을 속인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후 계속되는 무장투쟁에 대한 기사는 곳곳에서 보인다.

1920년 12월 21일 조선일보는 '간도에 있는 홍범도, 김좌진으로부터 부하소집 권고문, 군수품은 노농정부에서 공급한다고 말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독립단 수령 홍범도 일파는 돈화현을 떠나 간도에 들어가서 부하를 소집하는데 착수하고, 각 위원을 소집하여 서백리아(西伯利亞; 시베리아)로 옮기고자 계획하여, 홍범도와 김좌진 두 사람의 명의로 권고문을 배포하였으므로 독립단원의 각 부는 요사이 러시아 방면으로 옮기어 가는 자가 적지 아니 한다는데, 그 권고문의 대개를 들으면 '우리는 지금 러시아 노농정부와 협약하여 군수품 같은 것은 충분히 방비하였고, 기타 무기, 탄약 등도 제한이 없이 러시아 노농정부로부터 공급함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더라."

1921년 1월 24일 매일신보에도 관련 기사가 보인다. "간도 철병의 결과 귀순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은 조선인은 그 후에 감추어 두었던 무기를 꺼내 가지고 반항할 계획을 세워서 민심이 흉흉한데, 김좌진은 정가둔에 돌아가고 홍범도는 부하 300명과 규합하여 크게 일어날 준비를 하는 중인데, 일본 영사는 중국 관헌에게 그들을 체포해 달라고 전보로써 청하였다더라."

1926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 홍범도의 사망설이 실려있다. '홍범도 사망설, 러시아령 이만 지방에서'란 제목의 기사다. "20여년 동안 만주 벌판에서 극단의 배일주의자로 부하 수백여명을 거느리고 동서로 활약하던 홍범도(64)는 얼마 전부터 군사 자금을 조달하려고 부하를 거느리고 러시아령 '이만촌(村)' 근처에서 농사를 하던 중, 우연히 원수의 병마(病魔)에 걸려 고생을 하다가 지난 4월 중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최후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더라."

최근 친일 비난 등으로 시끄럽다. 100여년 만에 유해로고국을 밟은 홍 장군이 이것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해진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회사후소'(繪事後素)란 말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이라는 뜻이다.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기 위해 지금은 회사(繪事)할 때가 아닌, 소(素)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모처럼 하늘이 맑고 푸른 8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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