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국내 주식시장에는 자문형 랩 어카운트(투자일임 서비스) 열풍이 불었다.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주식 열풍으로 수 조원의 투자자금이 몰렸다. 개인투자자는 물론이고 법인 자금까지 증권사 랩 어카운트를 찾았다.
'차화정' 투자 바람과 랩 어카운트의 집중 투자 기법이 더해지면서 랩 어카운트는 부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자문형 랩 어카운트의 인기를 주도했던 곳이 삼성증권이다. 삼성증권은 2002년 황영기 전 사장 때부터 시작한 자산관리(WM) 사업 모델을 기초로 부자 고객을 사로 잡았다.
2011년 자문형 랩 어카운트의 인기는 그 해 하반기 증시 폭락으로 빠르게 식었다. 투자자문사의 투자 종목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투자 위험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불완전 권유 등 불편한 사실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른바 몰빵 투자의 위험이 드러난 셈이었다. 집중투자는 주가 상승기에는 엄청난 수익률을 안기지만, 주가 하락기에는 대처불가능한 리스크로 돌아온다.
'차화정 사태'를 겪은 후 증권사 랩 어카운트는 자산배분과 리스크관리에 충실했다. 삼성증권은 자산배분 모델에 기초한 종합자산관리 랩 서비스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삼성증권은 투자일임 서비스를 대폭 줄였다. 많은 사람이 삼성증권을 떠나기도 했다. 삼성증권의 일임 계약고는 여전히 2011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8년에는 유령 주식 사태까지 겪었다. 그러면서 삼성증권은 은둔했다. 1년 새 최고경영자(CEO)가 두번이나 바뀌는 불운도 겪었다. 공격적이라고 보일 만한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랬던 삼성증권이 올해 들어 완전히 달라졌다. 올 들어 시작된 중개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서비스를 업계 최초로 내놨다. 중개형 ISA 출시 후 2개월만에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자산관리 수수료와 운용 수수료를 무료화했다. 동학개미·서학개미로 대변되는 주식 투자 열풍으로 IRP를 이용한 상장지수펀드(ETF) 투자가 늘어나자 발빠르게 대처했다. 다른 증권사가 미처 준비할 틈을 주지 않는 놀라운 속도였다.
한달 뒤인 이달 초에는 공모주 청약 수수료를 유료화했다. 일부 증권사만 유료로 제공하고 있는 공모주 청약 서비스를 무료에서 유료로 전격적으로 전환했다. 고객 반발이 뻔히 예상됐지만, 청약 미 배정시에는 수수료를 면제한다는 단서를 달아 반대를 누그러뜨리는 치밀함도 보였다. 과열 양상을 보이는 공모주 청약 시장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는 물론이고, 청약 집중에 따르는 관리비용 문제를 제기해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금융투자업자 모두가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일을 한결같이 최초로 해냈다. 최근에는 사회기반시설(SOC)에 투자해 발생하는 수익에 대해 분리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투융자 집합투자기구 전용계좌'를 업계 최초로 열었다. 올해 들어서만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네 번째 업계 최초다.
2021년 삼성증권의 모습은 10년 전과 사뭇 다르다. 10년 전에는 자문형 랩 어카운트 바람이 불자 외형 확대를 위해 덩치 키우기에 몰입했다. 2021년에는 규모가 아니라 고객 수익률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중개형 ISA나 IRP 수수료, 투융자 집합투자기구 전용계좌는 고객의 수익률 제고를 돕는 수단이다. 공모주 청약 수수료 유료화는 투자자에게 투자 리스크를 환기시키는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
삼성증권의 변신에는 장석훈이라는 최고경영자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삼성증권 사장은 과거 김석 사장부터 윤용암·구성훈 사장까지 삼성자산운용 대표이사 출신이 도맡아 했다. 착오배당 사태 여파로 얼떨결에 삼성증권 대표이사 역할을 맡은 장석훈 사장은 삼성자산운용 출신이 아니다. 그는 삼성증권 출신이면서 삼성화재 인사담당 상무를 역임하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삼성증권에서는 인사팀장과 상품지원담당을 맡기도 했다. 또 삼성화재 재직 시절 미래전략실 해체로 사라진 삼성그룹 금융일류화추진팀의 일원이기도 하다.
삼성증권이 삼성자산운용 대표이사 출신을 사장으로 앉힌 데에는 자산운용과의 시너지에 몰두한 영향이 크다. 그런데 장석훈 사장은 자산운용보다는 삼성증권 자체적인 계좌(Account) 비즈니스를 개척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올해 장석훈 사장의 삼성증권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