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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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순종) 인산일에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 만세운동이다. 순종 서거에 따른 민중들의 울분을 배경으로 민족의 의지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폭압으로 스러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가 다시 지펴진 것이었다. 95년 전 그 날로 돌아가 만세의 함성을 다시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1926년 4월 25일 새벽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순종이 승하했다. 4월 27일자 매일신보에 '이왕전하 훙거(薨去 : 임금이 죽음), 한반도 5천년 왕정 사상의 최종 군왕'이라는 제목의 순종 승하 기사가 실려있다. "이왕전하께서는 53세를 일기로 전후 4삭(朔 ; 달)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계시와 일진일퇴하는 환세(患勢 ; 병세)에 갖은 고초를 다 받으시다가 마침내 25일 새벽 6시 5분에 파란 많은 반생의 역사를 남기고 가장 안온(安穩)히 쓸쓸한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이에 우리는 가장 정중한 의미에 있어서 조선 이조 500년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꾸밀 이왕전하의 승하 당시의 역사적 광경을 삼가 기록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해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일제 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6월 10일자 매일신보에 '인산(因山)과 부민(府民), 주의할 가지가지'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기사에는 △인산날부터 사흘동안 집집마다 반기를 달 것 △노인과 어린이는 위험하니 집이나 보게하라 △집을 나설 때 문단속·불단속을 엄중하게 하라 △길가에서 5시간 이상 서있을 각오가 필요하다 등의 주의와 당부사항이 담겨있다. 또한 "경성부내 한성, 조선, 대동, 대정, 한남 등 5개 권번 기생 500여명이 모두 소복을 입고 10일 새벽 3시부터 동대문 밖 청량리 부근에 도열하여 삼가 봉도(奉悼 ; 애도를 표함)의 뜻을 표한다더라"고 전했다.

하지만 수천명의 경찰과 군대의 삼엄한 감시는 뚫렸다. 서울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인산일 다음 날인 1926년 6월 11일자 매일신보에 당시 상황이 소개되어 있다. "국장 당일 오전 8시경에 국장 행렬이 창덕궁을 떠나 훈련원 식장으로 진발(進發; 나아감)을 하는 도중에, 봉도에 참가하고자 나왔던 연희전문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세부란스의학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 중에 소동을 하며 인쇄문을 선포하여 일시 종로와 황금정 부근은 대복잡을 이루었는데, 이로 인하여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이 약 200명가량이며, 그 중에는 묘령의 여학생 2명과 60세가 넘은 노인 1명, 소년군 대장 조철호(趙喆鎬)와 중앙학교 교원 서상국(徐相國) 등 여러 사람도 인치되었다더라."

1926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에도 시위자 체포와 취조 상황이 담겨있다. "만세 사건이 일어나자 현장에서 인치(引致 ; 강제로 끌어옴)한 학생과 신사들은 종로서, 본정서, 동대문서 등에 나눠 취조를 받다가 90여명을 종로서로 압송한 후 취조를 계속 중인데, 사건의 내용은 극히 간단하나 혹시 이면에 무슨 사실이 숨어있지 않은 가하여 엄중 취조를 계속 하는 중인데, 실로 경찰서 내의 공기는 긴장에 긴장을 더 하였으며, 근래에 볼 수 없는 살풍경의 상태이었더라."

같은 날 동아일보는 총독부 경무국이 발표한 '사건 개요'를 실었다. 오전 8시 30분경 종로3정목 단성사 앞에서 인산 행렬이 통과하자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40명이 만세를 부르며 불온문서 약 1000매를 산포했다. 이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11명이며 인쇄기와 잉크, 활자 등은 압수됐다. 관수교 부근에선 오전 8시 25분경에 연희전문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약 50명 가랑이 불온문서를 배포하며 만세를 불렀다.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오전 9시 30분경 청년 2명이 불온문서 약 1000매를 산포하고 만세를 고창(高唱)했다. 훈련원 부근에서 오후 1시경 1명의 학생이 구한국기(舊韓國旗)를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동대문부인병원 앞에서 오후 1시 10분경 상여가 통과한 후 시대일보 배달소년 김낙환 외 2명의 학생이 격문서를 산포하고 만세를 불렀다.

창신동 채석장 입구에서 50세 가량의 노인이 만세를 불렀다.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현재의 신설동)에선 오후 1시 45분경 상여가 신설리 고무회사 앞을 통과할 때에 어떤 학생이 격문서 약 100매를 산포했다.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선 오후 2시 20분경 4명의 학생이 격문서 약 700매를 산포했다. 이들은 시내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朴龍圭), 휘문고보 학생 황정환(黃廷煥), 중앙고보 학생 이동환(李東煥) 등이다. 이들은 5월 말 아는 사람에게서 등사판을 얻어다가 격문서 약 4000매를 등사했다.

이와 함께 지방 소식도 전하고 있다. 다음은 6월 12자일 조선일보 기사다. "최후의 인산 장의(葬儀)를 배관(拜觀 ; 배견)하기 위하여 인산 당일의 2,3일 전부터 경성으로 향하여 간 봉도단(奉悼團)이 실로 만여명에 달하기 때문에 임시열차까지 운전하여 인천역과 상인천역에는 대혼잡을 이루었다 하며, 만일을 경계하는 경찰 당국으로서는 경계망을 늘여놓고 주의자(主義者)의 출동을 절대 금지하였다는데, 인천 만국공원에서 청년 수십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문산(汶山) 시민 6000여명은 그곳 공원에 모여서 일제히 요배식(遙拜式 ; 망배식)을 거행하였다."

해외의 우리민족 매체들도 6·10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한 주간지 신한민보(申韓民報) 1926년 6월 17일자 지면에는 '망곡(望哭 ; 국상을 당해 백성들이 대궐 앞에서 곡을 함) 당일에 독립만세'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지난해 12월 정부는 6·10 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올해는 기념일로 지정된 뒤 처음으로 정부 주관으로 95주년 기념식이 치러진다. 이를 계기로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재평가되기를 기대한다. 나라사랑 하는 마음도 더욱 깊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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