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정페이 화웨이 창립자 겸 회장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는 이가 경쟁에서 이기고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기술제재 '철퇴'를 맞아 진흙탕에 내몰린 화웨이가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 제재로 무릎을 꿇고 구글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퇴출된 화웨이는 다음달 2일 자체 OS(운영체제) '훙멍(鴻蒙·Harmony)'을 정식 발표하고 이를 탑재한 신제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통신·스마트폰 시장에서 입은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자율주행차, 전기자동차 등 모빌리티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클라우드 서비스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포착한다는 '늑대정신'으로 기업문화를 무장하고, 회사 연못에 해외에서 들여온 검은 백조를 풀어놓고 예상치 못한 '블랙스완'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해온 런 회장이 창사 최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화웨이 폰=한때 삼성전자와 세계 1위를 다투던 화웨이의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은 2019년 2억3000만대에서 2020년 1억8000만대로 줄어들었다. 올해 8000만대 규모에 그칠 전망이다. 세계 시장점유율은 작년 2분기 20%에 이어 작년 3분기 14%, 작년 4분기 8%로 급전직하했다. 부동의 1위를 지켜왔던 중국 시장에서조차 지난 3월 15%의 점유율로, 비보(24%), 오포(21%)에 이어 3위까지 밀려났다. 외신들에 따르면 화웨이는 스마트폰 부품 공급사들에 올해 주문량을 60% 이상 줄이겠다고 통보했다.
미국 정부가 2019년 5월부터 자국 기업들에 대해 화웨이에 부품을 공급할 때 허가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규제를 개시하면서 추락이 시작됐다. 작년 5월부터는 미국 장비를 사용해 부품을 생산한 외국 기업들에도 화웨이에 부품을 공급할 때 미국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등 화웨이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통신장비 부문도 하락세다. 지난해 안방시장인 중국에서는 약 50%의 점유율로 1위를 유지했지만 중국 이외 시장에서는 약 20%로 2019년보다 2%p 낮아졌다. 에릭슨, 노키아에 이어 3위 자리를 지켰지만 에릭슨이 35% 점유율로 2%p 상승하고 노키아가 25% 점유율로 1%p 올라간 것과 달리 간격이 커진 것. 다만 중국이 글로벌 1위 시장인 덕분에 세계 1위 자리는 지켰다. 시장조사기업 델오로에 따르면 25개 이상의 유럽 통신업체들이 최근 수년간 화웨이 장비를 다른 제품으로 교체해 왔다.
화웨이는 지난해 11월 중저가 스마트폰 브랜드 '아너(룽야오)'를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수차례에 걸쳐 강화된 미국 정부의 제재 때문에 작년 9월부터 반도체 수급절벽을 겪으면서 스마트폰부터 랩톱, 태블릿PC, 통신장비, 서버 등 모든 종류의 제품 생산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제재 효력이 발효되기 전 대량으로 비축한 반도체 재고로 연명하고 있지만 한계상황에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평가다. 미국의 제재 속에 회사 곳곳에 전투기 사진을 걸고 결사항전 의지를 나타냈지만 심각한 생존위기를 맞은 것.
◇작년 4분기, 올해 1분기 연속 매출 감소=사업 부진은 매출에도 타격을 가했다. 작년에는 그나마 성장세를 이어갔지만 작년 4분기부터 분기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화웨이의 2020년 매출과 순이익은 각각 전년보다 3.8%, 3.2% 증가해 8914억 위안(약 153조4000억원)과 646억 위안(약 11조1000억원)을 기록했다. 연간 매출증가율은 2019년의 19.1%에서 크게 낮아졌지만 성장세는 유지한 것.
스마트폰·스마트워치·노트북 등 소비재 사업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3.3% 늘어난 4829억 위안(약 83조1000억원), 5세대 이동통신(5G) 네트워크 장비 사업 등의 매출은 전년 대비 0.2% 증가한 3026억 위안(약 52조원)을 기록했다.
전체 매출 중 중국 내 매출이 전년 대비 15.4% 늘어난 5849억 위안(약 100조6000억원)에 달한 반면 해외 매출은 전년보다 줄었다. 전체 매출에서 해외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50%에서 작년 35%로 줄었다.
특히 지난해 4분기 매출은 11% 감소한 2201억 위안(약 37조8000억원)으로, 미국 제재 이후 처음 감소했다. 여기에다 올해 1분기 매출은 1500억5700만 위안(약 25조8000억원)으로 작년 동기보다 16.9% 감소했다. 이는 미
중국 광둥성 동관에 위치한 화웨이 신사옥마을 전경 <출처:화웨이>
국의 고강도 제재가 회사의 외형 감소로 본격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화웨이는 올해 1분기에 5G 특허료로 약 6억달러(약 6700억원)를 벌어들이면서 매출 1522억 위안(약 26조3800억원), 순익 168억5000만위안(2조92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이 16.5% 줄어든 가운데도 순익은 특허료 수입 덕분에 26% 늘어났다.
◇안드로이드 OS 포기하고 독자 OS로
화웨이는 미국 제재에 무릎을 꿇고 안드로이드 OS를 포기한 채 스마트폰 신제품 '메이트40' 4G 모델부터 독자 OS 훙멍을 탑재해 선보인다.
이는 글로벌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퇴출됨을 의미한다. 화웨이는 기존 사용자들에게도 훙멍 OS로의 업그레이드 안내를 시작했다.
화웨이는 25일 웨이보를 통해 내달 2일 '훙멍 OS와 신제품 발표회'를 연다고 밝혔다. 훙멍은 스마트폰용 전용 OS가 아니라 스마트TV, 태블릿PC, 인공지능 스피커, 자동차, 사물인터넷 기기에서 범용적으로 쓰이는 OS로 개발됐다. 화웨이는 2019년부터 스마트TV와 일부 웨어러블 기기에서 훙멍을 채택했다.
화웨이가 훙멍을 본격 채택한 것은 미 정부의 제재로 구글 모바일 서비스를 지원받지 못하게 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린 결정이다. 회사는 2019년 훙멍이 처음 발표한 후 업그레이드해 왔다. 문제는 과거에도 중국 당국의 제한으로 플레이스토어 등 구글의 대부분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던 중국 고객들은 이런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해외 고객들은 훙멍이 깔린 제품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화웨이는 다른 중국 기업들과 '훙멍 동맹'을 구축하는 방안을 추진하지만 이는 중국 전체 스마트폰 생태계를 갈라파고스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화웨이는 훙멍을 구글 안드로이드 같은 표준 OS로 자리매김시킨다는 구상이다. 올해 말까지 훙멍 OS를 설치한 기기를 3억대로 늘리고, 그 중 1억대는 타사 제품이 될 것이란 기대를 내놨다. 그러나 SW뿐 반도체 수급난도 심각해지면서 스마트폰부터 랩톱, 태블릿 PC, 이동통신 기지국, 서버 등 모든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 가운데 런 회장은 최근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세계를 선도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겹쳐지는 영역에선 소프트웨어를 최적화해 하드웨어를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프트웨어 영역에서는 신제품에 대한 미국의 통제가 적은 만큼 훨씬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런정페이는 중국 시장에 집중하되 동시에 아시아·유럽·아프리카 시장도 노려 '화웨이의 영역'을 만들자고 밝혔다.
2016년 전 직원들에게 한 연설에서 5G와 클라우드 컴퓨팅을 염두에 두고 "물속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날씨의 변화를 어떻게 알겠는가. 현재의 일기예보는 미국이 만들어내고 있지만, 앞으로 화웨이가 인류를 위한 일기예보를 해야 한다"고 밝힌 런 회장은 여전히 꿈을 버리지 않은 모습니다.
◇SW 넘어 클라우드로= 화웨이는 소프트웨어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클라우드 서비스 사업을 강화하면서 하드웨어 기업에서 서비스 기업으로의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화웨이는 지난 4월 쉬즈쥔(徐直軍) 화웨이 순환회장을 화웨이의 클라우드 부문 자회사인 화웨이 클라우드의 회장으로, 위청둥 화웨이 소비자 부문 CEO를 화웨이 클라우드의 CEO로 각각 임명했다. 쉬즈쥔 회장은 클라우드 관련 조직개편과 인사에 대해, 화웨이가 반도체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클라우드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화웨이는 2010년부터 클라우드 사업을 시작해 작년 16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작년 4분기 중국 내 시장 점유율은 17.4%로, 알리바바 클라우드 인텔리전스의 40%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언택트 수요가 늘면서 중국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중국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은 작년 66% 성장한 190억 달러에 달했다.
◇올해 자율주행에 1조원 투자…연내 '화웨이 인사이드' 차 나온다
지난달 19일 중국 상하이 모터쇼 현장. '화웨이 인사이드'(HUAWEI INSIDE)라는 로고가 적힌 자율주행차에 참관객들의 눈길이 쏠렸다.
베이징차의 전기차 전문 자회사 베이징차신에너지와 화웨이가 협력해 만든 첫 자율주행차 '아크폭스(Arcfox) αS HI'다. 수년 전부터 자율주행차 기술 연구에도 매달려 온 화웨이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중국에서 본격적인 승부를 걸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이벤트였다.
미국의 고강도 제재로 위기에 내몰린 화웨이가 미래 사업 중 하나로 키우는 자율주행차 부문에서 낸 첫 결과물이다.
아크폭스 αS HI는 베이징차신에너지가 개발한 전기차 '아크폭스αS'에 화웨이가 개발한 자율주행 시스템을 결합한 모델이다. 이 차에는 화웨이가 개발한 치린 칩과 12개의 카메라, 수십 개의 레이저, 초음파, 밀리미터파 레이더가 장착돼 레벨3 이상의 자율주행 능력을 갖췄다는 설명이다. 또 10분 충전으로 197㎞를 주행할 수 있다. 차량에는 화웨이의 훙멍이 OS로 탑재됐다.
화웨이의 구상은 인텔이 '인텔 인사이드'를 내걸고 PC용 CPU(중앙처리장치) 시장을 장악한 것처럼 자율주행차 시장의 '두뇌'를 잡겠다는 것이다.
쉬즈쥔(徐直軍) 화웨이 순환회장은 올해 자율주행차 기술에 10억 달러(약 1조1000억원)를 투자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화웨이의 자율주행 기술이 이미 테슬라를 능가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화웨이는 베이징자동차, 충칭창안자동차, 광저우자동차 등 3개 자동차 제작사와 협력하기로 했다. 이들 회사의 서브 브랜드 차량에 '화웨이 인사이드' 로고를 붙일 것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올해 4분기부터 차량을 내놓을 계획이다.
◇화웨이 전기차 성공적 데뷔...이틀만에 3000대 판매
화웨이는 전기차 시장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전기차 업체 싸이리쓰(賽力斯·SERES)와 화웨이가 공동 개발한 전기차 SF5 화웨이즈쉬안(華爲智選) 모델이 지난 4월 21일 출시 후 첫 이틀간 3000대 이상 판매됐다.
이 차는 싸이리쓰의 기존 전기차 SF5에 화웨이의 전기차 시스템인 '하이 카'(HiCar) 시스템을 장착한 모델이다.
화웨이가 공동으로 제작한 전기차가 양산돼 일반 고객에게 팔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출시 이틀만에 3000만대를 판매함으로써 화웨이는 처음 진출한 전기차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청둥(余承東) 화웨이 소비자 부문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의 제재로 스마트폰 부문이 큰 곤란에 직면했다"며 "스마트 전동차는 수량이 스마트폰처럼 많지 않겠지만 액수가 커 스마트폰 판매 감소를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다시 들어가고 싶다"
전방위 생존노력을 펼치는 가운데도 화웨이의 가장 큰 바람은 글로벌 IT 공급망에 다시 편입돼 통신·스마트폰 시장에서의 위치를 되찾는 것이다.
화웨이는 지난 4월 한국에서 개최한 '화웨이 애널리스트 서밋 2021'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인 반도체 수급난은 미국의 화웨이 제재로 인해 관련 협력사들이 영향을 받은 결과라면서 "한·일·유럽 등 반도체 선진국과 협력해 글로벌 공급망에 다시 들어가길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중 패권경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어 갈라파고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화웨이의 희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