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여름이다. 여름은 파리의 전성기다. 100년 전 파리는 지금보다 사람들을 몇배 더 괴롭혔다. 파리는 모든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로 지목되어 박멸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1만3500여 명을 숨지게 한 1920년의 콜레라는 파리가 퍼트렸다고 한다. 당시 '파리와의 전쟁'을 어떻게 했는지 근대신문을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1921년 4월 16일자 매일신보는 파리를 '악마'에 비유했다. '악마 같은 승(蠅; 파리)을 퇴치하라, 파리 한 마리에 5만의 매균(媒菌; 전염병을 전파하는 균)이 붙어 있다'는 제목의 기사다. "전염병 매균을 산포하는 무서운 우리의 대적(大敵)되는 파리가 발생하는 시기가 왔다. 특히 금년은 겨울 이후로 비상히 따뜻해 온돌과 쓰레기 쌓인 곳에 병식(屛息; 숨을 죽임)해 있던 파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많으며, 금년은 지금부터 이 파리를 없애지 않으면 장래는 파리로 인해서 참해를 당할지도 모르겠다. 파리는 일반이 아는 바와 같이 번식하는 힘은 비상히 맹렬한 터이라, 한 마리의 파리에는 약 5만의 매균이 붙어 있는데, 경성부는 5월이 되면 대대적으로 파리 구제 선전을 개시할 터이라더라."
당시 신문들은 파리 잡는 것을 마치 적군과 싸움을 하듯 묘사했다. 1921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승군(蠅軍)을 포살하라, 함평경찰서의 주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함평경찰서는 군내 객주집 운영자, 음식업자를 불러 4월 1일부터 변소를 청결하게 개량하여 매일 소독하며, 경찰서는 파리병과 소독약을 나누어 주고, 쓰레기통을 각 호에 만들어 놓고 추한 것을 버리게 하여 전염의 병균을 없애기로 하여, 영업자 편에서는 이를 시행하기에 매우 분주하다더라."
1921년 4월 22일자 매일신보에는 '승군(蠅軍; 파리) 토벌 대선전 파리 잡는 기계까지 배포, 아무쪼록 파리를 없애라'라는 제목의 기사가, 1921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에는 '흉적(凶賊) 승군(繩軍) 토벌, 잡으라! 무서운 파리 떼를, 경성부민이 동심협력하여'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파리를 나라를 팔아먹은 '흉적'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신문 광고란 역시 4월 하순부터 파리약 판촉 전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파리약 광고에는 전투적 표현들이 많았다. '전멸' '박멸' '정벌' '원수' '때려죽여라' 등의 원색적 단어가 광고 카피에 넘쳐났다.
'파리 박멸 캠페인'도 활발히 벌어졌다. 노방선전반(路傍宣傳班; 길거리에서 선전하는 것)을 조직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연설을 하고 파리 구제 사진전도 열었다. 경성우편국 앞, 대한문 앞, 남대문 역전, 광화문통 등 큰 길가에 석회로 '파리 구제'라는 표어를 크게 써서 행인들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게 하기도 했다.
당시 파리 잡는 도구로는 파리채, 파리잡이 병, 파리 약 등이 흔히 쓰였다. 파리잡이 병은 식당이나 가정집에서 파리를 잡기 위해 사용하던 유리 재질의 오목한 병이다. 병에 물을 채워 놓고 그 안에 들어간 파리를 가두어 잡았다. 경성부내 각 소학교 아동들에게 파리 채를 무료로 배부하여 매일 반드시 5 마리씩 잡게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효과적인 파리 박멸을 위해 파리를 잡아오면 총독부에서 돈까지 주었다. 파리를 사들이는 정책은 꽤 효과를 보았다. 1921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에 '승가'(蠅價; 파리 값) 관련 기사가 보인다. "하루 동안에 급자기(생각할 사이 없이 뜻밖에) 파리 값이 1리(厘)로 내리고 말았다. 경성부 위생계는 25일부터 파리 한 마리에 3리 씩 사들인다 함은 이미 누차(屢次) 보도한 바이나, 첫날 네 곳에서 사들인 파리는 14만 마리에 이르렀고, 팔러 온 사람은 500여 명에 달한 대성황을 이루었다 하며, 둘째 날인 어제 26일에는 더욱 많아서 경성부 문 앞으로부터 현관까지는 통행할 수 없도록 '파리 장사'로 가득하여 서로 먼저 팔고 가려고 어깨를 부비고 떠드는 모양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시골까지 가서 파리를 잡아 파는 분자(分子; 사람)가 많은 듯 하므로, 사들이는 것은 26일로 마치고, 다른 방책을 강구하여 어디까지나 철저한 박멸을 하고자 한다."
그해 4월 25~28일 4일 동안 매입한 파리는 144만2000 마리에 달했다. 첫날인 25일에 14만2000 마리, 26일에 50만 마리, 27일 45만 마리, 마지막 28일에는 35만 마리를 사들였다. 나흘 동안 지출한 파리 대금은 1,175원에 달했다.
1921년 5월 14일자 조선일보에도 '가경(可驚; 가히 놀랄만한) 승군(蠅軍) 토벌, 늘어놓으면 평양에서 개성까지 뻗치는 파리를 구제(驅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평양경찰서에서는 전염병 예방 방법으로 금년에는 시험적으로 파리를 잡아 보았는데, 그 파리는 실로 10석에 가까운 다수의 파리를 잡았는지라, 이 파리를 한 마리씩 늘어놓으면 평양에서 개성을 갈만한 거리에 이르는 다수의 파리를 잡았는데, 단지 숫자로만 들으면 대단히 많이 잡은 듯 하지만 평양에 있는 파리의 1/100 분밖에는 아니 된다더라."
파리 박멸뿐 아니라 광견병 예방도 실시됐다. 1921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다. "부산경찰서에서는 광견병 예방책으로 일반 축견에 대해 무료 주사를 시행하고, 접종 종료 후에는 귀에 적인(赤印; 빨간 도장)을 하고, 주사 완료 후에는 야견(野犬; 들개) 박살(撲殺; 때려죽임)을 개시하고, 그 적인이 없는 개는 모두 박살할 터이라더라."
100년 전 여름철 전염병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던 것처럼, 당장 눈앞의 코로나19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 특권을 이용한 온갖 부정부패 등도 박멸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는 뚜렷한 답이 없는 듯 하다. 승군(蠅軍)이라면 박살(撲殺)이라도 낼텐데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