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의 부동산 투기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같이 공유해야 할 땅을 가지고 투기를 해 돈을 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100년전 일제강점기 때도 땅은 투기의 대상이었다. 땅 투기에 목숨을 걸었던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1925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경성대학의 준공과 신학생촌 출현, 효제동과 연건동 일대는 지금부터 땅값이 올라간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경성대학 건축공사는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터를 잡아놓았는데 예산이 결정만 되면 올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까지 전부 준공할 예정이라는 바, (중략) 총 2,500여 평에 달한다는 바, 본래부터 이 근방은 각종 학교가 많은 곳이므로 이제 또 경성대학이 준공되면 이 근방은 학생촌이 되고 말 것이며, 따라서 그곳의 번영은 가히 미루어 짐작 할 만한데, 이로 말미암아 이 근방의 중심지인 효제동, 연건동, 숭4동, 동숭동 부근의 땅값은 1923년에 평당 5,6원 하던 것이 최근에 와서는 30원으로 껑충 뛰어올라오게 됐다더라."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은 일제의 제국대학령에 근거하여 6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이었다. 약칭은 성대(城大)였다. 1924년 5월 예과가 개설되어 수업이 시작됐다. 당시에는 소나무 숲이 무성했던 청량리 전차 종점 근처에 예과 건물을 지었다. 1926년 5월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개설됐다. 법문학부 건물은 동숭동에, 의학부 건물은 바로 길 건너의 조선총독부의원 자리에 지어졌다. 동숭동 법문학부와 연건동 의학부 사이에 있던 길이 오늘날의 대학로다. 근처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등이 있었다. 경성제국대학까지 들어서면서 이 곳은 학생가(學生街)가 됐다.
하지만 이 정도의 땅 값 상승은 한반도의 가장 오지 함경북도에 불었던 광풍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1932년 여름, 청진(淸津)과 웅기(雄基) 땅 값이 들썩였다. 이 곳이 대륙 진출의 관문이 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앞서 일제는 1928년 함북 회령과 중국 지린(吉林)을 잇는 길회선(吉會線) 철도를 부설했다. 이를 연장해 동해 쪽에 종단항(終端港)을 만든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이 곳 땅값이 급등한 것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청진도, 웅기도 아닌 나진(羅津)이 종단항으로 선정됐다. 예상 밖의 결과였다. 1932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길회선 종단항 나진으로 결정, 23일 만철(滿鐵)에 허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길회철도 종단항은 30일 총독부 관보로 나진만을 중심으로 공유수면 매립, 웅기-나진간 사철(私鐵) 건설 토지수용령 등에 대한 만철 허가지령이 반포되었다. 이에 장시간의 현안인 길회선 철도 종단항 문제는 나진을 중추로 3항 병용주의를 취하기로 하였다 한다."
삽시간에 나진에 황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32년 12월 27일자 매일신보에 '만철 수용지 결정되자 나진에 또다시 황금풍(黃金風), 오른다 오른다 여기만은 돈벼락, 평당 29원'란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신항구 나진에는 요새 또 토지매매가 성행되는데, 간의동(間依洞) 방면의 토지는 최고로 평당 29원까지 간다고 한다. (중략) 만철 수용지가 발표되자 황금바람이 불어 토지가격이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한다."
당시 나진은 불과 20호 미만의 작은 어촌이었다. 평당 2~3전 하던 땅값이 삽시간에 10원으로 뛰어올랐다. 가격은 폭등세를 이어가 3년 뒤에는 수백배로 뛰었다. 결국 총독부가 '최고 5원, 최하 1원20전'으로 강제로 토지 수용 가격을 결정하면서 투기 광풍은 막을 내린다. 땅을 사놓은 수많은 사람들은 알거지가 됐다.
'나진 땅바람'은 우리나라 부동산 투기의 '전설'이 됐다. 이후 땅 투기 기사가 지면에 흔해지기 시작했다. 1934년 7월 10일 동아일보에 '웅기 토지가 광등(狂騰), 백사장(白沙場)이 평당 40원'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나진이 길회철도의 종단항으로 결정되자, 웅기가 그 자매항으로 장래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목표로 재작년 이래 토지값이 평상보다 수십배의 등귀(騰貴)를 보이고 있던 바, 7월 6, 7 양일간에 읍유매립지 53필지 4,355평을 공매에 붙인 바, 수백명의 원매자가 쇄도하여 우선 30필지를 공매한 바, 백사장 한 평에 최고 42원 10전, 최저 18원 6전으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이런 부동산 투기의 열풍은 평양까지 확산됐다. 다음은 1936년 11월 2일 매일신보에 실린 '3곳의 인도교 가설 위치도 결정, 투기배에겐 희비쌍곡선'이라는 기사다. "평양 도시계획안에 나타난 도로망 건설 계획에 의하여 제2인도교 가설을 위시하여 수 개의 인도교 건설안도 부민들이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바, 3개의 인도교 신설 위치가 계획안 중에 결정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파되자 인도교 가설을 예상하고 투기적 토지투자를 행하였던 토지상인들 간에는 희비가 양극으로 시작되었다."
이처럼 투기꾼들의 땅 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자 조선총독부는 투기 억제에 나섰다. 1939년 8월 2일자 조선일보에 '공업지대 대상 투기, 뿌라-커 발호 철저 단속'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토지 뿌라-커들이 각지에 발호하고 있는 형상임에 비추어 총독부에서는 그 억압대책을 연구 중,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하였다. 즉, 앞으로 생기는 공업지대는 모두 '조선 시가지 계획령'으로 토지수용령을 적용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정한 지대 이외에는 소위 '생산적 녹지대'라는 농경지대로 지정을 해버린다 하더라."
예나 지금이나 투기는 끝이 없고, 이것은 모두 인간의 끝없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소사소득(小舍小得), 대사대득(大舍大得), 무사무득(無舍無得)이라 했다. 작게 버리면 작게 얻고, 크게 버리면 크게 얻고, 버리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투기를 막아야 하는 이유는 투기가 너무 위험천만하고 공동체까지 파괴하기 때문이다. 투기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투기 거품의 마지막 비련의 주인공이 되지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