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부르는 소리는 방방곡곡 천지를 흔들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왜곡 · 폄훼 보도 "각지에서 괴수로 인정할 만한 자 무더기 체포" 한 세기 지났건만 … 친일파 청산은 언제쯤 될지
102년 전인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온 땅에 자유와 평화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이와 지역과 신분을 초월해 모두가 하나가 되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 3·1운동을 보도했던 국내외 신문을 통해 억압과 폭력에 맞서 새 시대를 열기 위해 항거했던 그 때를 살펴보고자 한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말고는 변변한 신문이 없었다. 일제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신문이라 3·1 운동에 대해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당시를 파악할 수는 있어 소개를 해본다. 1919년 3월 7일 매일신보는 3면에 '각지 소요(騷擾)사건, 경성을 위시하여 각 지방 소동'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3월 1일 오후 2시 반에 학생 3,4천명은 경성 종로통에 모여 군중이 부화(附和;자기의 주관없이 남의 행동에 참여함)하여 여러 대(隊)로 나누어 일단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 이르러,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일시 대한문 안으로 침입하였다가 다시 대한문 앞 넓은 마당에서 독립 연설을 하였고, 일단(一團)은 경성우편국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다시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의주통으로 나가 불란서 영사관에 이르고, 일단은 창덕궁 문 앞으로도 가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일단은 조선보병대 앞으로 가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못하고, 또 대한문 앞의 단체에서 나뉜 일단은 미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단체 약 3000명은 총독부로 향하려 함으로써, 본정통(지금의 충무로)에서 이것을 막아 운동은 일시 표면으로는 진정되었다."
그 날의 시위는 일제의 대대적인 체포로 이어졌다. 같은 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군중 중에 괴수(魁首)로 인정할 만한 자 130명을 체포하였으며, 처음의 소요가 진정된 후 1일 오후 8시경에 마포 전차종점 부근에 약 1000명이 모였고, 또 11시 쯤에 야소교 부속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학생 약 200명이 집합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헤어졌고, 2일 정시 20분에 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약 400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경찰서 앞으로 지나가매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제지하고, 괴수로 인정할 만한 자 20명을 체포하였는데 나머지 군중은 모두 헤어졌더라. 그러한데 이 군중의 다수는 노동자이고 학생도 더러 섞여 있었다."
체포 작전은 그 이후에도 계속 진행됐다. 1921년 3월 28일자 매일신보에 '식도(食刀)로 헌병을 살해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청년의 기사가 눈에 띈다. "평안남도 강서군 성대면 현곡리 송진탁(宋振鐸)은 대정 8년(1919년) 3월 3일 오전 동지 3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가서 그곳 주재소를 습격했고, 5일 강서군 사천헌병주재소를 읍습(蔭襲;습격)하여 가지고 다니는 식칼로 헌병 한 명을 살해한 후 독립만세를 부르고 피가 흐르는 옷은 모두 벗어 버리고 도망하였는바, (중략) 금년 2월경에 결국 체포되어 현재 취조 중이다."
철저한 보도통제가 이루어졌을 국내 신문과 달리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교민 신문인 신한민보는 그날을 객관적으로 자세하게 보도했다. 3월 13일자 1면 '대한독립선언서, 대한독립 대운동의 대활동, 수천명이 잡혀 악형을 당할수록 독립을 부르는 소리는 천지를 흔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자. "우리는 열등한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42세기의 긴 역사를 가졌고, 확실한 자유정부가 있었던 민족이다. 우리가 현 세계를 다시 건축하는 시기를 당하여, 우리의 고유적 자유와 영원한 국권을 회복하여 발전함은 우리의 독일무이(獨一無二)한 큰 책임이다. (중략) 우리 자손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가르쳐 주니, 쓰고 맵고 수치스러운 것은 조금이라도 우리 자손에게 유전치 말지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마지막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싸워야 한다."
이날 신한민보는 중국 상해(上海) 영문신문 '예졘쓰'의 기사도 인용해 보도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한국 독립단은 참으로 튼튼한 반석(盤石)과 같이 조직되었는데, 각 도회처에서 거리거리 골목골목에 모여 독립 선고문을 고성(高聲) 대독(代讀)으로 읽을 때 그 독립 선고문을 읽는 자를 순검 병정이 잡으려고 한 즉, 백성들이 둘러싸고 죽기로 보호하며, 한인(韓人)들의 손에서 태극기를 들고 휘휘 휘두르며 일본의 국기는 발로 밟고 손으로 찢어 버리며, 일본 헌병들이 총 끝에 칼을 꽂아 가지고 해치려고 할 때에는 한인들이 차갯돌(작싯돌)을 준비하였다가 그 머리를 때려 깨치나 피차 접전하는 마당에 독립 선고문을 읽던 자들이 중상(重傷)한 자가 많았고, 순천에서는 30명의 한인이 포착(捕捉)되었다더라."
3·1운동은 그 후 조선이 아닌 해외에서도 계속 맥이 이어졌다. 1923년 3월 6일자 조선일보에 '중국 각지에서 기념 만세, 3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세 삼창 후에 추도가도 불러'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북경(北京) 모처에서는 조국을 회복하기에 노력하는 동포 수백여명이 모여 지난 1일을 독립선언기념일이라 하여 태극기를 높이 달고 만세를 부른 후에, 국가를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난 열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추도가(追悼歌) 글을 지어 불렀다 하며, 천진(天津)에서도 어느 곳에서 30여명이 회합하여 그와 같이 기념식을 거행하여 만세를 삼창하고 역시 추도가를 불렀다더라."
3·1운동이 일어난 지 벌써 100년이 지나갔건만 아직도 친일파 청산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반성도 없으며 일부에서는 심각한 왜곡도 일어나고 있다. 우유 한 컵(150㎖)을 버리면 팔당호 수질 정도로 희석하는데만 5만 컵(7500㎖)의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5만 배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냇물이 맑은 이유는 샘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쉼 없이 3·1운동을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며, 그 분들의 이름 석 자만이라도 세상에 드러나게 해야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야 맑은 샘물이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