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이선희 옮김/부키 펴냄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그 한마디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이기에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44년 헌신했던 직장에서 퇴직 송별회를 마치고 돌아오다 뇌출혈로 쓰러진 예순 다섯 사내. 병상에 누워있는데 불현 듯 나타난 한 여인에 이끌려 도심을 소요(逍遙)한다. 저승사자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고급 레스토랑에서 여인과 함께 살살 녹는 프랑스식 만찬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한다. "당신 참 열심히 살았어요"라고 속삭이는 여인의 감미로운 말에 환상여행 속으로 빠져든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철도원' '지하철' 등으로 한국 독자에게도 익숙한 일본 중견 소설가 아사다 지로의 최신작이다. 철도원 속 단편 '러브레터'는 '파이란'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상처를 따뜻한 문장으로 위로해온 그답게 굴곡으로 얼룩진 주인공의 '보상여행'을 통해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주인공 다케와키 마사카즈는 마담 네즈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의 손에 이끌려 병원 밖으로 별 세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인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죽마고우 도오루가 병상 옆에서 이제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그래서 짐을 벗어던지라고 한다. 실은 마사카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였던 것. 출생의 비밀을 고백하려던 차 어느새 젊은 육체로 변한 마사카즈는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시즈카라는 젊은 여인과 거닌다. 해변은 그의 심중 깊숙이 있던 트라우마를 깨운다. 죽은 어린 아들의 사진을 들고 아내가 서있다. 그들은 아들의 죽음에 서로를 탓하며 상흔을 쌓은 부부였다. 마사카즈의 여행은 계속된다. 옆 병상의 팔순 노인 가짱, 가짱의 젊었적 연인 미네코, 마사카즈의 첫사랑 후즈키와 조우하고 다시 현실의 병실로 돌아온다. "이제 돌아와요"라고 애원하는 병상 옆 아내의 말에 정신이 돌아올 듯 하다가도 마사카즈는 여전히 의식의 한켠에서 환상의 지하철 플랫폼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사카즈는 지난 40년 치열하게 살아온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의 모습이다. 아사다 지로는 그들을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라며 다정하게 어루만저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 역시 주인공과 같은 해인 1951년 생으로 고도성장기에 살았다. 소설은 타인에 대해 좀 더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독자를 안내한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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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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