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일 아닙니까. 가속기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이라면 중이온가속기가 저렇게 될 줄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요."
국내 가속기 전문가는 뾰로통한 말투로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에 따르면 몇 해 전부터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이 초기와 달리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는 것. 이런 직감은 그 뿐만 아니었다. 가속기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고, 그 때부터 사업 성공 여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갈수록 많아졌다는 얘기다 .
이렇듯 오래 전부터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의 비정상적 추진을 걱정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과학계 전반에 확산돼 있었다. 사업 총괄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은 이 같은 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단지 몇 차례 종합 점검에 나섰을 뿐, 여전히 사업 전반에 대한 관리 감독에는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이후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2019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질의에 사업단장은 "당초 계획대로 2021년 12월까지 구축이 가능하다"는 말로 사업 추진에 문제가 없음을 자신했다. 그러던 것이 1년이 지나 확 달라졌다. 작년 국감에선 사업단장은 "2021년 말까지 구축하기 어렵다"고 말을 바꿨다. 급기야 심각성을 인식한 과기정통부는 지난해 하반기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총괄점검단위원회를 꾸려 사업 전반에 대한 검증에 나섰다.
지난 2일 총괄점검단의 최종 점검 결과가 나왔다. 점검단은 "올 12월 예정된 사업기간 내 목표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지었고, 아예 '구축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극단적 입장을 내놨다.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에 대해 사실상 '수습 불능' 판정을 내린 것과 마찬가지다.
중이온가속기는 양성자에서 우라늄까지 다양한 무거운 이온을 가속시켜 희귀동위원소를 생성, 핵물리, 물성과학, 바이오 의료, 에너지 환경 등 다양한 기초과학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거대 연구시설이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대전 신동지구에 구축되고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IF(온라인 동위원소 분리시스템)와 ISO(비행파쇄 시스템) 방식의 두 희귀동위원소 생성방식을 동시에 사용하는 세계 유일의 중이온가속기라는 점에서 구축 당시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렇다면, 정부가 10년 동안 무려 1조5000억원을 쏟아 부으며 추진하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은 왜 이렇게까지 망가져 갔을까. 가속기 전문가들은 거대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의 사업관리 역량 부족과 처음 시도해 보는 '초전도 가속기'에 대한 선행 연구 부족, 공정관리 부실 및 전문인력 부족, 사업 리스트 관리 소홀 등 여러 요인을 꼽았다.
특히 2015년 가속기 실험 전문가로 사업단장이 바뀌면서 사업이 정상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사업단장 교체 이후 정부가 공을 들여 해외에서 모셔온 가속기 전문가들이 하나둘씩 사업에서 배제된 것이 가장 큰 패착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외에서 가속기 구축사업에 실제 참여하면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핵심장치인 '초전도 가속관' 개발 경험이 있는 전문가 그룹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들은 사업 전면에서 빠지게 됐고, 한창 진행하던 가속관 개발은 비전문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겉돌기 시작했다는 건 가속기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이온가속기 사업은 처음 계획과 달리 잦은 설계 변경과 사업기간 연장 등을 통해 점점 변질돼 갔다. 구축 시기가 처음 2017년에서 2019년으로, 다시 2021년으로 지연됐다. 이번 점검에선 최소 4년 이상 늦춰질 것으로 예상됐다. 이대로 라면, 총 세 차례에 걸쳐 구축 시기만 8년 가량 지연되는 셈이다.
가속장치 개발 계획도 당초 저에너지 가속장치(SCL1), 고에너지 가속장치(SCL2), 저에너지 가속장치(SCL3) 중 2017년 'SCL1' 개발이 취소돼 사업 범위가 축소됐다. 이마저 고에너지, 저에너지 가속장치는 성능 미확보로 언제쯤 설치될 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사업은 이미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이렇듯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로 과학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은 '예견된 실패작'이나 다름 없는 신세가 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잘못된 점은 바로 잡으면 된다. 거기에는 명확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1조5000억원이라는 국민의 혈세가 투입됐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투입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해외 전문가로 구성된 점검단을 꾸려서라도 정상궤도에 올려 놓아야 하는 게 과학계의 사명이다. 앞으로는 국민들에게 과학적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순리를 거스리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는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