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인인증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난 20여년간 우리의 디지털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공인인증서 제도가 전자서명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국가 공인과 호환성을 무기로 높은 수준의 인증이 필요한 서비스로부터 사소한 본인 확인에 이르기까지 '싹쓸이'했던 공인인증서가 공식적으로 사라짐으로써 이제 전자서명 시장은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공인인증서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액티브X 플러그인,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또 깔게' 만들었던 불편함과 특정 OS나 웹브라우저에 특화된 탓에 다양한 기기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던 답답함이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대통령까지 나서 폐지를 약속한 다음에야 법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IMF로부터 탈출하며 정보화를 통한 국가 경제발전을 꾀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통일적이고 강력한 국가 주도의 전자서명이 전자상거래와 전자금융거래의 발전에 기여했던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인전자서명이 사라질 운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구 탓도 아닌 공인인증서 그 자신 탓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다양한 국민적 수요가 생겨났음에도 그에 부응하지 못했던 공인인증서 자체의 내재적 문제가 곪아터졌기 때문에 치유할 여유도 없이 전격 폐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치유와 변화의 수용을 통하여 발전적 전환을 이끌어내지 못한 점은 끝내 아쉬운 부분이지만, 이제는 공인인증서가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더 발전적 미래를 설계해야 할 때다.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열려있다. 공인인증서 폐지 논의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전자서명 인증제도가 지속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공인인증서가 사라진 세상, 모든 전자서명은 원칙적으로 동등하다. 그러나 실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이제부터야말로 진검승부가 펼쳐질 시기이다. 변화하는 기술을 누구보다 빨리 적용하고, 국민들의 수요에 맞는 편리함과 안전성을 갖춰야 하며, 인증의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통용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증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하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디지털 세상의 핵심 인프라로서 전자서명·인증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디지털 격차가 되어서도 안 된다. 전자서명·인증은 안전한 지능정보사회 서비스에 접근하기 위한 관문의 역할을 하거나 증명의 기능을 한다. 전자서명·인증이 유료화되거나 그 가격에 따라 신뢰수준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면, 그로 인해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에도 차별화가 생겨날 수 있다. 이런 일까지 생겨날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전자서명·인증이 새로운 디지털 격차가 될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고 모든 국민의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자서명·인증의 다양성은 보장돼야 하지만,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성과 안전성이 담보돼야 할 영역에선 국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전자서명·인증이 활용될 가능성도 열어줘야 한다. 유의할 건 신뢰수준의 확보가 필요한 것이지 특정 기술·서비스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디지털 통상의 새로운 파고가 다가오고 있다. 세계 주요 국가들이 전자서명·인증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고 다른 나라에서도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국제적인 프레임워크를 만들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 동안 국내 시장에서의 전자서명과 인증에만 관심을 가지고 작은 시장을 나눠먹는 노력만을 해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전자서명·인증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서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민관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한다.
공인인증서가 사라진 지금, 국민들은 더 편리하고 간편하며, 더 안전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인증 서비스를 기대한다. 국민의 수요에 부응하면서 전자서명·인증이 발전할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혁신과 경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