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은 1896년 종로에서 군중에게 살해됐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俄館播遷)한 후 김홍집과 유길준을 비롯한 을미사적(乙未四賊)을 처형하라고 명령하자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길에서 성난 군중에게 살해된 것이다. 일본군이 피신을 요구했으나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하지만 외국인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일본의 도움을 얻고자 해서 친일파로 몰렸지만, 오로지 조선을 위해 그 길을 택했음을 죽음으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마지막 행동을 보면 처음에 품었던 생각을 알 수 있다.
요즈음의 한국 사회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분란이 없을 수 없고, 그것은 또한 세상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분란의 내용이 문제다. 지금 한국의 분란은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놓고 다투는 것도 아니며, 진정한 정의나 공정의 실현을 위해 다투는 것도 아니다. 정작 토론의 중심내용이 되어야 할 이런 것들은 그저 정치인과 정치집단의 집권을 위한 책략과 편견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도구로 왜곡되고 있을 뿐이다.
정의(正義)나 공정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정의(定義)하거나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참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관습, 전통, 제도, 도덕, 법 등에 배어 있다. 즉 정의와 공정은 이기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원활한 운행을 위해 형성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존중하고 사회 형성의 주춧돌로 삼는 것이 정의와 공정의 실현이다.
인간의 다양성과 이성의 무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는, 자신이 아는 편린(片鱗)의 지식이 지식의 모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 세상을 그들의 지식수준에 맞춰 획일화하려고 획책한다. 그 결과 인간의 다양성은 외면되고 사회는 전체주의의 늪으로 빠져든다.
지금 한국의 모습이 그렇다. 집권 세력이 정의와 공정을 독점하고 입법과 정책적 만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을 무시한 탈(脫)원전 정책, 정권 유지와 안전을 위해 정의로 위장한 검찰개혁, 나라의 곳간을 텅 비우는 재정의 확대지출, 공정을 가장하여 시장경제의 근간인 기업을 죽이는 이른바 공정3법, 정의를 앞세워 가정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다락같이 높인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소유를 죄악시함으로써 소유의 기원인 정의를 해치는 임대차법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인간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적 지식과 지혜로 문명을 이룩한다. 이는 물론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무지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한 인간은 문명의 과정을 미리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무지하다는 사실로부터 요구되는 개인의 자유를 정의와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하는 모든 행위는 문명을 퇴보시키는 만행이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면 정의와 공정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세력은 이와 같은 입법과 정책은 적폐를 청산하고 정의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아주 기초적인 이론과 실증만 들여다보아도 이런 것들이 빚어낼 결과는 빤하다. 모두 부정적이다. 진정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행동이라면,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이를 증명하는 만절(晩節)을 보여야 할 것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다던가.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20세기에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 21세기의 초입에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지금 살아있는 것이 잘못인가. 대한민국의 재조산하(再造山河)를 위한 과제만 쌓여가고 있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