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정경부 차장
김승룡 정경부 차장
김승룡 정경부 차장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중략) 하나, 공익을 우선시하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이하 생략)"

공무원 헌장이다. 요즘 공무원이 되려는 청년들, 이른바 '공시생'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보다는 오후 6시 땡 치면 퇴근하고, 정년이 보장되는 안전한 직장을 찾으려는 사회 풍토 때문이라니 씁슬하다.

우리나라 행정 공무원은 17만명이 넘는다. 17만명 중에 공무원 헌장대로 일하는 공무원이 과연 얼마나 될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자면 공무원이 '심부름꾼' '정권의 시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혼이 없다. 소신이 없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한다. 철밥통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공무원 스스로 제 목소리, 올바른 정책 소신을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과거엔 당정청(黨政靑) 회의를 하면 '정'의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당청 회의'로 국가 주요 정책이 결정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돼 '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원래부터 '정'은 형식적 존재였나.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이 근간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언제부터인가 입법부, 국회의 권한이 막강해지면서 행정부의 목소리는 작아지기 시작했다. 여당과 청와대가 결정한 정책을 정부가 반대라도 할라치면 갖은 협박과 압력이 들어온다. 여당과 청와대가 결정한 정책이 최근 들어 정부 반대로 바뀐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권과 국회가 기침을 하면, 정부 부처는 감기에 걸린다.

최근 이런 현상을 극명히 보여준 일이 있었다. 바로 현재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월성1호기 조기폐쇄 의혹' 사건이다. 조작이니 은폐니 의혹 투성이지만, 공무원이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특히 소위 '윗사람'인 고위 공직자가 공무원 헌장대로 공익을 우선시하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면 피할 수 있었다.

감사원은 지난달 20일 정권의 갖은 압박에 1년 넘게 끌어온 '월성1호기 원전 조기폐쇄'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은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조기 폐쇄를 결정하면서 원전의 경제성을 불합리하게 낮게 평가했고, 회계법인 평가과정에 개입했으며, 증거 자료를 고의로 삭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사원은 최종 조기폐쇄 타당성을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애매모호한 감사 결과를 내놨고,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외에 청와대 개입 여부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자 야당이 정권이 조작했다며 검찰에 고발했고, 현재 검찰의 수사 칼날은 청와대를 향해 있다.

2018년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담당 과장이 "월성1호기를 2년은 더 가동해도 된다"고 하자, 펄쩍 뛰면서 "너 죽을래? 이런 보고서를 청와대에 어떻게 보고하란 말이냐. 즉시 가동중단으로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 회의에서 "월성1호기는 언제 가동을 중단하느냐"고 단지 궁금해 물었던 것 뿐인데, 아랫사람들은 탈원전 기조에 맞춰 알아서 '즉시 가동중단'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국무위원이라는 장관이 이러니 그 밑에 있는 공무원들이 자신의 정책 소신을 제대로 말 할 여건이 안 된다. 일본말로 '시다바리' 잘 하다가 밥그룻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 영혼 없는 정책들이 걸러지지 않은 채 마구 쏟아져 나오면 결국 피해는 모두 국민에게 돌아간다. 공무원은 공익을 위해 혁신 정책을 입안하고, 당청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책이라면 그것이 설령 정책기조에 반한다 해도 받아들여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 아닌가.

지난 3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답변하는 중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그 이유를 홍 부총리 이렇게 밝혔다. "저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저께(지난 1일)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일단 현행 (대주주 기준) 10억원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최근 2개월간 갑론을박이 있었던 상황에서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싶어 제가 오늘 사의 표명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10억원으로 갑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게 공직자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가 그냥 지나가기에는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사의 표명)이 오히려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주식 양도세 과세 대상 대주주 기준을 정부는 종전 10억원에서 3억원으로 낮추는 원래 안을 주장했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당 의견대로 10억원으로 정해진 것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 뭐 그런 얘기였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홍 부총리가 정부를 대변해서 내세운 정책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거의 없었다. 올해만 해도 1차 재난지원금 지급범위, 2차 추경 편성, 재정준칙 등 여러 사안을 놓고 여당과 부딪혔는데, 단 한 번도 홍 부총리 안이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사직서를 반려하고 재신임했고, 이튿날 국회에 다시 출석한 홍 부총리가 "인사권자 뜻에 따라 직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갈수록 희미해지는 '정'의 존재감에 마지막 액션 한번 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럴 것 없이 오로지 국민을 섬겨 국민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처음부터 직을 걸고 소신을 지키라. 그래야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세 기둥 중 하나를 맡고 있는 행정부의 제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국민의 찬사를 받게 될 것이다.

김승룡기자 srkim@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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