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지난 5일 법무부와 대법원 등의 내년도 예산안 심사를 시작하던 자리였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에게 전액 삭감된 법고을 LX USB 제작 예산 3000만원을 다시 살려야하지 않겠느냐 하던 순간이었다.
법고을 LX는 USB 메모리를 통해 제공되는 국내 최대의 법률정보 데이터베이스다. 주요 대법원 판례와 각급 법원 판결, 헌법재판소 결정례, 대법원 규칙·예규·선례, 법원도서관 소장 도서목록과 저작권 동의된 법률논문의 원문자료 등을 담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원래 1억5000만원 예산 편성을 요청했으나 3000만원밖에 반영되지 않았고, 이후 전액 순감됐다.
박 의원은 "다리 하나 놓을 예산도 안 되는데 법사위가 너무 짜게 심사한다"면서 "예산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 처장에게 권했다. 그런데 "의원님, 예산을 꼭 살려주십시오"라고 애걸하라는 게 선행조건이었다.
현직 대법관이기도 한 조 처장은 끝내 '의원님 살려주십시오' 이 한 마디를 완성하지 못했고, 박 의원이 "답답하다"면서 조 처장을 대신(?)해 수 차례 이 말을 반복했다.
국회 의사중계시스템으로 이 장면을 보다 문득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면이 연출됐는지 곱씹어봤다. 예산심사·심의권을 쥐고 있을 뿐인 국회의원이 행정부도 입법부도 아닌 사법부의 예산을 다루면서 왜 구명줄을 쥔 듯한 언행을 했을까. 박 의원은 막말 논란이 거세지자 입장문을 내고 "예산이 회복돼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이었다"면서 "다만 예산심의 권한을 가진 국회의원이 우월적 권한을 남용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사과 드린다"고 해명했다.
막말 논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박 의원 논란이 빚어진 이튿날인 지난 6일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X자식들, 국토부 2차관 빨리 들어오라고 해" "이 XX들 항명이야, 항명"이라고 거친 말을 내뱉는 모습이 취재진에게 목격됐다. 내용을 들어보니 가덕도 신공항 적정성 검증 예산을 증액하려는 민주당과 반대하는 국토교통부 간 갈등이 표출된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민주당이 '가덕도 신공항 문제가 아니었다'는 해명을 내놨지만, 당장 민주당이 국토부 2차관과 논의할 현안은 가덕도 신공항이 유력하다. 민주당은 이날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토교통부 예산심사에서 "가덕도 신공항 검증용역 예산을 20억원 증액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절차를 생략하고 따르라고 하는 건 어렵다"며 거절했다. 최종적으로는 여당의 뜻대로 정책연구 사업비에 20억원이 추가 증액됐다. '국토부 2차관 빨리 들어오라던' 김 원내대표의 거친 통화는 앞서 논란이 됐던 윤영찬 민주당 의원의 '카카오 들어오라고 하세요'랑 닮은 꼴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예산 심사 이전에는 국정감사에서 막말에 고성언쟁을 더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달 2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감에서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과 민주당 소속인 이원욱 위원장의 말다툼이 이어졌다. 발언시간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종단 "저 XX 진짜 위원장이라고, 더러워서 정말" "야" "나이도 어린 XX가" 등 격한 말을 주고 받았고, 흥분한 이 위원장은 정회를 선포한 뒤 의사봉을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말이 악재로 돌아오자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공직자는 항상 말을 골라가며 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맞다. 공직자뿐 아니라 비단 누구라도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라면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 게 맞는다. 국회의원들이 항상 입에 달고 있는 말처럼 '국민을 대신하는 국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막말 논란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여야를 가를 문제도 아니다. 권위를 지켜야 할 국회가 스스로 권위를 내세워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조선후기 학자인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 중에는 '내부족자 기사번 심무주자 기사황'(內不足者 其辭煩 心無主者 其辭荒)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고,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는 뜻이다. 그 거친 말 한마디가 본인뿐만 아니라 국회의 신뢰와 권위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줬으면 한다. "의원님, 제발 국회의 품격을 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