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장우진 기자] 삼성그룹은 1993년 고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대대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함축되는 고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양 중심에서 질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됐으며 뼈를 깎는 대수술을 통해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설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 회장은 취임 5년차인 1993년 2월 주요 임원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해 한 가전매장을 찾았다. 그는 삼성이 자부하는 제품들이 현지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GE, 필립스, 소니, 도시바 등 글로벌 전자회사들의 제품 진열장 한 귀퉁이에 삼성 제품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열돼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삼성 제품이 싸구려 취급을 받는 것을 본 이 회장은 LA 센추리프라자 호텔 회의장에서 78가지 전자제품을 갖다놓고 당장 분해하라고 했다. 당시 회의실에서는 내내 호통과 불호령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회장은 그해 6월 일본 기업 교세라에서 직접 스카우트한 후쿠다 다미오 삼성전자 디자인고문과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자리했다. 후쿠다 고문은 4년간 삼성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점을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일본 기업이 세계 1위 제품을 내놓고도 연구소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삼성은 국내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일찍 퇴근하더라', '삼성 직원은 텃세가 심해 외국인 고문 얘기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듣지 않으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세탁기 사건이 터졌다. 삼성 사내방송 SBC의 몰래카메라 영상물에는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직원들이 칼로 2㎜를 깎아내고 조립하는 장면이 담겼다.
이를 확인한 이 회장은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명을 프랑크푸르트로 집결시켰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말하며 '신경영' 선언을 했다. 양 위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특히 그는 제품의 불량을 '암'에 비유하며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는 병폐임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단순히 불량률을 낮춰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제로'로 만들 것을 주문했으며 이를 위해서라면 생산량을 줄일 수도 있다고 피력했다. 단 한 개의 품목이라고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자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라인스톱' 제도 도입과 '구미 화형식'은 이러한 이 회장의 의지가 잘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라인스톱은 불량품이 발생하면 그 즉시 라인을 멈춘 다음 문제를 해결하고 재가동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또 1995년 3월 단행한 '구미 화형식'은 구미 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 15만대를 모아 불태운 사건으로 '질'을 위한 고 이 회장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해 8월 삼성전자 애니콜은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을 기록해 국내 정상을 차지했다.
고 이 회장의 뚝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어록으로는 '베이징 선언'이 있다. 그는 1995년 베이징 특파원 오찬에서 "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말했다. 정부가 지나치게 규제만 쏟아낸다는 비판을 가감 없이 내뱉으면서 당시 재계와 정치권에서 화제가 됐다.
고 이 회장은 '불량은 암'이라고 정의내리고 양이 아닌 질로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바꿀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신경영 정착을 위해 뿌리부터 바꾸고자 한 그의 의지는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서기 위한 첫 걸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