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0년 전 한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웹호스팅을 하면서 동시에 3D 채팅 게임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3D 채팅은 당시 개념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사업이었다. 가상현실 행성을 만들어 그 안에서 대화는 물론 게임도 하고 광고도 하는 등의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었는데, 마치 리니지의 3D 버전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통신속도와 컴퓨터 처리 능력이 따라오지 못했다. 당시 최신형이 팬티엄3였고 ADSL에서 VDSL로 겨우 전화선을 벗어나려는 시점에서 용량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가입자 수는 1만명을 넘겼지만 실제 사용자는 100명 남짓에 불과한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다. 돌이켜보면 만약 10년 뒤에 좀 더 완성도 있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당시 벤처 버블 시대에는 때를 만나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한 사업들이 부지기수였다. 여러 물리적 한계도 있었지만 시장 여건이 받쳐주지 못한 경우가 많다.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 싸이월드가 만약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했다면 페이스북과 자웅을 겨룰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도 해본다.
최근 정치권에서 다시 나오는 '경제민주화' 역시 때를 잘 못 맞춘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물론 총선에서 압승한 여당 입장에서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할 순 있다. 만약 코로나19 팬데믹이 없었다면 여당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하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당장 내일 굶어죽을 판인데, 체질개선을 걱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정기국회를 앞두고 재계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있다. 정부여당이 소위 경제민주화법으로 자평하는 '공정경제 3법'(상법 일부개정 법률안,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 법률안, 금융그룹의 감독에 관한 법률안)을 비롯해 사실상 대기업을 적폐의 대상으로 단정하는 여러 법안들이 연쇄 통과를 앞두고 있어서다. 여기에 김종인 국민의힘 대표까지 경제민주화법에는 긍정적인 입장을 내놓으면서 재계의 긴장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이 여당 아닌 야당을 찾아가 법안처리를 막아달라고 설득하는 상황까지 몰렸겠나.
사실 법안 자체의 취지는 좋다. 감사위원의 독립성을 강화해 기업 경영상의 부정을 막고, 갑인 대기업이 협력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소송 여건과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반대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소수의 지분으로 다수의 기업을 지배하는 상당수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 역시 언젠가는 해야 할 과정이다.
문제는 부작용과 타이밍이다. 안전장치 없는 법안을 악용할 경우 외국 자본이 국내 대기업의 경영권을 뒤흔들 수 있고, 소송전이 난무하면서 국내 중소기업과의 거래 자체를 꺼려하는 대기업들이 속출할 수 있다. 아울러 지배구조 역시 수십년간 쌓여온 고질병인 만큼 시간을 두고 출구 전략을 마련한 뒤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자국 우선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수출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시도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부가 주유소 옆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계는 외국과 대비되는 이런 역주행에 답답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중국에서 자국으로 돌아오는 기업에 대해 비용을 100%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중국은 반도체 배터리 등 신산업 육성을 위해 자국 기업에 수백 조원에 이르는 지원정책을 추진 중이다. 세계 각국이 법인세 등을 낮춰 기업 투자 활성화를 지원하는 반면 우리나라만 조세부담이 늘어나는 중이다.
전경련, 중기중앙회, 한국경총 6개 단체는 지난 16일 공동 성명을 내고 "세계 각국이 위기 극복을 위해 기업 규제 완화 등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마음껏 나설 수 있게 하는 규제 완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경제 5적(敵)'이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여·국·검·시·세'로 꼽히는 여당, 국회, 검찰, 시민단체, 세금정책 등 경제 5적이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자칫 때를 못 맞추다가 후대에 '을사 5적'보다 더 미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