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비중이 높고 비생산적이 되면 화폐유통 속도가 떨어진다는 경제 역사의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3년 전 2017년 1월 미국의 통화유통속도(광의의 통화량(M2) 대비 국내총생산(GDP)으로 측정)가 1.44배로 사상 최저로 떨어졌을 때 미국 채권전문가 레시 헌트가 한 말이다. 이후 미국 정부는 법인세 인하와 기업친화정책을 펼쳤고 3년 넘게 통화유통속도가 상승 중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금 심각한 '돈맥경화증'을 앓고 있다. 이달 한국경제연구원이 내놓은 '주요국 통화유통속도 비교' 분석에 따르면 2018년 한국 통화유통속도는 0.72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0.80)보다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 해 우리나라의 통화유통속도 하락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16개국 가운데 가장 컸다. 통화유통속도는 경제현장의 활력을 가늠하는 척도다. 통화유통속도 하락은 시중 자금이 생산·투자·소비로 들어가지 않고 금고나 통장 속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의 방안은 재정과 통화의 폴리시믹스(Policy Mix·정책조합)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이 다 같이 폴리시믹스로 고려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릴 때마다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국회를 향해선 '슈퍼 예산'을 요구하는 식이다.
정작 중앙은행이 경기를 진작시키려 돈을 풀어도 유통속도가 떨어지다 보니, 민간은 유동성이 많다고 느끼지 못하고 물가가 반응하지 않게 된다. 지난해 하반기 한은은 두 차례 기준금리를 내렸지만 물가를 올리진 못했고 풀린 돈은 부동산으로만 가고 있다.
지난 1월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은 1월 기준 16년 만에 최대 증가 폭을 나타냈다. 한은의 '1월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은행 가계대출은 892조 원으로 한 달 전보다 3조7000억 원 증가했다. 이는 역대 1월 기준으로 볼 때 2004년 통계 편제 이후 최대 증가 폭이다.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로 흐르지 않는데 '금리 인하'와 '재정 퍼붓기'에만 매달려선 경제 호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방증이 지표로 나온 셈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리 인하에 선을 그은 이유다. 이달 금통위를 앞두고 이 총재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추가 금리 인하 필요성은 효과도 효과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 또한 있기 때문에 이를 함께 고려해서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상 금리 인하로 선제 대응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단순한 폴리시믹스만으로는 화폐유통속도를 올리기도 어렵거니와 부작용만 키우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화폐유통속도가 2017년부터 반등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경기 호황과 소비자물가 상승에 힘입어 2016~2018년 기준금리를 인상했기 때문이다. 침체된 경기를 살릴 근본적인 처방 없이 시중에 돈을 푸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금리가 낮아도 기업과 가계가 돈을 쓰지 않는 '유동성의 함정'에 빠져 있음은 통화량이 사상 최대지만 통화승수가 사상 최저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한은에 따르면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의미하는 부동자금은 지난해 11월 말 기준 1010조7030억 원으로 1000조 원을 넘어섰다. 기존 폴리시믹스로 '잠자는 돈'을 깨울 수 없다면 새 폴리시믹스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재정을 확대하더라도 무작위적인 살포가 아닌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곧 재정승수가 높은 곳에 사용해야 하고 금리 인하의 경기부양 효과도 따져 볼 일이다.
돈을 찍어내는 게 급한 게 아니라, 돈이 경제주체들 사이를 활발히 오가도록 해 화폐유통속도를 올려야 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기업들은 투자를 꺼려 돈을 은행에 보관해 두고, 개인의 돈은 부동산으로 흐르는 모양새다.
기업 규제 완화와 법인세 인하,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통해 기업의 숨통을 틔워주고 투자할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투자로 인해 돈이 돌면 소비와 일자리가 생기고 개인과 기업의 수익이 생긴다. 이처럼 돈의 물꼬를 시원하게 터줄 폴리시믹스만이 꽉 막힌 경제혈류를 뚫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