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가 있었다. '경제'와 '확실한 변화'라는 키워드가 제시됐다. 바람직하다. 경제 성장을 통한 변화만큼 확실한 변화는 없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다. '경제'와 '확실한 변화' 키워드 말고 '공정'과 '혁신'이란 키워드가 12번 이상 나왔다. 이번 정부의 3대 경제정책 중 2가지인 '공정경제', '혁신성장'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좋다. 그런데 '공정경제'와 '혁신성장'이라는 게 너무나도 이율배반적인 키워드다. 공정하면서 혁신이 가능한가. 혁신이란 말 그대로 기존 기득권을 깡그리 무시하고 새로운 토대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기존 기득권을 무시하는 게 과연 공정일까. 혁신산업, 혁신벤처만 이 나라를 배 불릴 수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혁신금융이라고 하는 핀테크 산업만 혁신산업이고, 기존 금융산업은 혁신산업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차량 공유서비스인 '타다'만 혁신이고, 기존 택시는 다 버리고 바꿔야 하는 것인가.
혁신이란 것 자체가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율배반적인 경제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대기업은 다 죽어야 하고, 중견중소 기업과 벤처만으로 이 나라 수출을 세계 7위에서 4위로 끌어올릴 수 있나. 이 나라를 국민소득 3만달러에서 5만달러로 키울 수 있나. 차라리 혁신과 공정 대신 '상생경제'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그렇게 혁신성장 외쳤지만, 아직도 혁신성장에 필요한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신용정보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 법제도조차 마련되지 못했다. 원격의료만 보자. 기존 의료계의 철옹성 같은 기득권에 눌려 원격의료 서비스는 지난 20년을 외쳐도 되지 않았다. 차라리 북한이 더 원격의료 서비스에 앞서 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4월 총선을 앞두고 기득권을 인정한 건 정부와 여권 아닌가. 공정의 진정성이 떨어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사건을 보면서 우리 청년들은 또다시 분노해야 했다. 지난 정부 최순실의 딸만큼 조국 전 장관의 딸 또한 공정하지 못했다. 공정하지 못한 게 이뿐인가. 이번 정부 들어 소위 '낙하산' 인사가 더 많아졌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계 출신 공공기관장과 감사 수가 이전 정부보다 배로 늘었다. 정계 출신 공공기관장 10명 가운데 7명은 이른바 '캠코더'(대선·코드·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사였다.
대통령 신년사에서 또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정권 초부터 그렇게 외쳤던 '소득주도성장'이란 키워드가 사라졌다. 일명 '소주성'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소주성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높여 전체 경제 성장을 이루겠다는 의미라고 정부는 그동안 설명해왔다. 그러나 소주성은 반환점을 돈 4년차 문재인 정부에서 폐기 신세임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저소득 1분위(하위 20%) 계층의 소득이 증가세로 전환했다고 했다. 팩트가 아니다. 정부는 2019년 3분기 하위 20% 저소득층의 소득이 전년에 비해 4% 가량 증가했다며 '소주성' 정책의 결실이 보이고 있다고 자화자찬했다. 어디 통계를 한 번 볼까.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3분기 소득 하위 20% 가구(전국 가구원 2인 이상)의 월평균 소득은 137만4000원으로, 2018년 3분기에 비해선 4.3% 증가했다. 하지만 이번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3분기 하위 20%의 소득은 141만6300원으로 2019년 3분기에 비해 오히려 약 3.0% 감소했다. 2년 전에 비해선 소득이 줄었는데, 1년 전에 비해 소득이 찔끔 늘었다고 정책 성과가 있다고 자랑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기초연금 인상, 근로장려금 확대, 건강보험 보장확대 등 저소득층에 재정을 쏟아부었는데도 나아진 게 없는 것이다. 소주성 정책은 반드시 수정해야 할 정책이다.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가 정부 재정에만 의존한다면 그게 무슨 성장이란 말인가. 윗 돌 빼서 아래 돌 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차라리 소득계층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중산층의 소득을 늘리는 게 훨씬 경제성장에 유리하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찔끔 늘어나도 소비가 확 살아나진 않는다. 그러나 중산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가 눈에 띄게 는다. 소비가 늘면 기업 투자가 늘고, 일자리가 늘어나 소득이 증가하면 다시 소비가 늘어나는 선순환 고리가 생성된다.
본지가 최근 국내 경제연구기관 연구위원, 대학 경제학 교수, 증권사 등 금융권 임원 등 경제전문가 60명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정부의 3대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정책을 각각 100점 만점 기준으로 평가해달라고 한 결과, 경제전문가 대다수가 3대 정책에 모두에 60점 미만의 낙제점을 줬다. 특히 소주성 정책은 46명이 60점 이하의 점수를 줬다.
연초부터 중동 정세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고, 미중 무역분쟁 등 각국의 보호무역이 성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올해도 우리 경제가 심상치 않을 전망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확실한 변화'를 위해선 경제정책의 대대적 수정이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