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성인 233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방송·연예 부문 올해의 인물로 펭수가 선정됐다. 트로트 신드롬을 일으키며 시청률 '요정'으로 군림한 송가인을 제친 것이다. 트로트 신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해 화제를 모은 유재석, 세계 순회공연을 마친 방탄소년단도 제쳤다. '직통령' 펭수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펭수는 원래 EBS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만든 캐릭터였다. 기존 캐릭터들이 주로 유아용이라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도 어린이들이 EBS로부터 멀어지는 문제가 있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기존 캐릭터보다 조금 더 높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펭수를 탄생시켰다.
남극에서 태어난 펭수가 우주 대스타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향하다 스위스에 들러 요들송을 배운 후 다시 한국으로 헤엄쳐 와, 인천에서 EBS 관계자를 만나 연습생으로 계약했다는 엉터리 같은 스토리에 어른들이 반응했다. 요즘은 고급스럽지 않고 허술해보이는 B급에 열광한다.
특히 인기를 끈 요인은 도발적 언행이다. 'EBS 아육대'에서 EBS 주요 캐릭터들이 운동회를 열었는데, 기존의 순진무구한 태도와는 달리 선후배 위계질서를 따지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서 펭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항의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어른들이 크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초통령'을 목표로 했던 펭수이지만,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개념은 어른에게 더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직장인들의 대통령, '직통령'이 된 것이다. 성인들이 반응하자 펭수 편성을 아예 심야시간대로 옮기고 성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립'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장 이름 언급이다. '돈 없으면 김명중을 부른다'는 식으로 EBS 사장 이름을 펭수가 마구 부르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방송인이 방송사 사장 이름을 가볍게 거론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어른들만이 펭수의 언행이 기존 위계질서에서 있을 수 없는 파격이라는 걸 이해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뜨겁게 반응한 것이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수평적인 의식을 가지고 성장했다가 사회에 진입하면서 비로소 수직적 질서의 쓴맛을 알게 되며 현실을 배우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는 별 볼 일 없는 아저씨들인 줄 알았던 '꼰대'들이 내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자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 질서에 대해 위화감과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펭수가 조직의 가장 밑바닥인 연습생 신분으로 맨 꼭대기인 사장을 우습게 거론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펭수는 PD도 로드매니저 취급을 하며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
이런 펭수의 언행에 2030세대가 공감, 대리만족,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에 펭수의 인기가 사회적 신드롬으로까지 발전했다. 거기에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키덜트' 현상, 우스꽝스러운 것에 열광하는 인터넷 유희문화까지 더해진 것이 방송·연예 부문 올해의 인물 선정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펭수 신드롬이 뜨겁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젊은이들 사이에 기존의 수직적· 위계적· 권위주의적 질서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처럼 윗사람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사회였다면 펭수가 PD나 사장을 가볍게 거론하는 것이 화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장 이름 불렀다고 신드롬이 터진 것은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적 질서가 그만큼 공고하다는 뜻이다. 2030 세대는 그런 구조에 반감을 가지지만 현실적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그때 연습생 펭수가 나타나 현실에선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으며 도발한 것이다.
요즘 나타나는 기성세대와 그들이 만든 사회구조에 대한 반감은 과도한 측면도 있다.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꼰대'라며 싸잡아 조롱하고 기존 질서와 권위 자체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식으론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와 기존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문제와 별개로 우리 사회 구질서의 수직성이 너무 강한 건 사실이다. 그것이 인터넷 세대의 수평적 감수성과도 충돌하고, 시민사회의 성장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제조업 강국엔 이르렀지만 첨단 지식산업을 성장시키지 못하는 것에도 수직적 질서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보다 수평적으로 변화해 캐릭터가 사장 이름을 불러도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