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 동안 적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27명의 왕 가운데 단 7번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단종이나 연산군처럼 가족이 일으킨 정변으로 폐위되거나 혹은 병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권력의 힘은 무섭다. 특히 살아있는 권력이 잡음 없이 후세에 전권을 물려주기란 더더욱 어렵다.

지난 14일 숙환으로 별세한 LG그룹 2대 경영인 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재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귀감이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LG의 창업 초기부터 함께했고, 25년 동안 총수를 맡았던 회사를 미련없이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는 재계 전반을 봐도 찾기 어려운 사례다. 심지어 동네 맛집도 2대 째로 넘어가면 세포분열 하듯 흩어져 '원조' 다툼을 한다.

하지만 그는 지난 1995년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아무런 사고나 이유 없음) 승계'로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구 명예회장과 함께 '동반퇴진'을 단행했고, 이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됐다.

자신보다 회사가, 그리고 국가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결단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중시한 '인화'(人和)의 경영철학이 LG그룹 전반에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7년 간 불협화음 하나 없이 LG그룹을 만들어 온 구씨,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가 아무 잡음 없이 GS그룹과 LS그룹 등으로 나눠지며 원만하게 마무리된 것 역시 인화의 경영철학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구인회 창업회장의 뜻을 받들어 구 명예회장이 합리적인 원칙에 바탕을 둔 인화의 경영을 철저히 지켰고, 상호 신뢰와 의리를 바탕으로 사업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고 LG그룹 측은 소개했다.

아버지와 함께 키워온 권력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아들, 그리고 친척들일지라도. 누구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더 아쉬웠을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장자승계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고,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또 집안의 큰 어른으로 '아름다운 이별'도 성사시켰고, 현재 LG그룹의 정도경영 밑바탕을 탄탄히 다져놓았다.

어쩌면 그는 우리 재계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을 선생님처럼 몸소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구 명예회장의 유년 시절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지수초등학교를 다닐 때 과학을 접목한 농경법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 친화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것과 교사의 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구 명예회장은 유가(儒家)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도 실사구시를 중시하며 번성해 온 능성 구씨 집안의 후손으로, 1925년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슬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 하는 가풍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과 흐트러짐 없이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구 명예회장은 엄격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총수로 성장했다. 고인의 재임 기간 동안 LG의 매출은 약 1150배 성장했다. 그리고 인화의 경영철학을 아들인 고 구본무 회장에게 그대로 물려줬다.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 역시 20여년 간 실무 경험을 쌓게 했고, 검소하면서 겸손한 삶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구 명예회장은 25년 간 은퇴 후 일체의 허례와 허식 없이 간소한 삶을 즐기며 그야말로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은퇴 후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분야에 각별한 열의를 보였고, 버섯 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이 만들어온 LG의 전통은 4대에 이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4대까지 지키고 있는 국내 대기업은 사실상 LG가 유일하고, 여전히 정도경영과 인화를 바탕으로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경영철학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LG 출신의 한 전직 경영인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구 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아들과 함께 있는 그의 사진을 올리며 이 같이 글을 적었다. "가족간 탈이 없는 멀쩡한 재벌이 거의 없었다. 한국 재계의 모범인 '인화의 LG'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점점 세상이 각박해지는 시절이다. 가족들 간 재산 다툼은 물론이고 심지어 근친 살해까지 서슴지 않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정치인들은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고, 버려진 서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 스스로 권력을 놓고, 엄격하지만 원칙을 지키며 사람을 아낄 줄 알았던 구 명예회장의 생애는 재계 뿐 아니라 정치권, 사회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와 같은 참 리더가 벌써 그리워진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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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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