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자경(왼쪽) 명예회장이 故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고 있다. LG 제공
LG 구자경 1925 ~ 2019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국내 재계에서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국내 기업사에 첫 '무고(無故, 아무런 사고나 이유가 없음) 승계' 사례를 남긴 것은 물론, 은퇴를 경영혁신의 하나로 보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일부 대기업의 승계 과정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형제의 난'이 LG에서는 무풍지대일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자진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선친의 부름을 받아 LG에 몸담은 지 45년, 선친의 타계로 회장을 맡은 지 25년 만이었다.
고인의 퇴진은 국내 재벌가 최초의 무고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재계 관행으로는 70세였던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퇴진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하나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 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힌 바 있다.
고인이 1995년 2월 이·취임식장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며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을 비롯해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퇴진'을 단행했다. 이런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됐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란 그가 추진해 온 경영혁신의 하나였고, 본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혁신 활동이었다. 고인은 훗날 "은퇴에 대한 결심은 이미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차기 회장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내 나름의 밑그림이었다. 그래서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됐고, 혁신의 대미로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아울러 고인은 지인들에 은퇴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섣달을 보내며 나름의 감회를 지니게 되지만, 내게는 각별히 다른 의미가 하나 더해진다. 선친의 기일 역시 섣달그믐날이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1994년의 섣달그믐 만큼은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마음속의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