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은 역시 설민석이었다. 어제 방송된 tvN의 책 소개 프로그램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설민석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소개하며 울분을 토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사람의 뼈까지 갈아 마셔야 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을 소개할 때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고, 자리를 함께한 일동이 모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어제 방송은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2.1%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설민석이 대중에 끼치는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국보 132호 <징비록>은 우리 역사에 드물게 잘 보존되어온 기록문학으로서,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 최고의 명문대가 선정한 '한국학 공부 시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이다. 임진왜란 발발 전 조선과 일본의 정세에 대한 상세한 기술부터 시작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한 관군의 붕괴와 민중의 분기, 수군의 승전과 전선의 교착, 강화 교섭의 실패와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정밀하고 생생하게 기록한다. 특히 부록에 해당하는 녹후잡기(錄後雜記)에 있는 '전시 중의 각종 대비책'은 오늘 날의 '전시(戰時) 매뉴얼' 같은 실질적인 대비책을 제시해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이런 이유로 <징비록>은 당시 조선을 넘어 중국, 일본에까지 알려져 동아시아 전체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성룡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자서'라는 글에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시경詩經』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患難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징비록: 국역정본>(14p)
예를 들어 이런 기술이다.
"(서울을 떠나 피란 길에 오른 왕의 행차가)마산역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밭 가운데 있다가 바라다보고 통곡하며 '국가가 우리를 버리고 떠나니, 우리와 같은 무리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합니까?' 하였다."-<징비록: 국역정본>(100p)
권력의 최측근의 자리에 있었던 유성룡만이 쓸 수 있는 거침없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정작 <징비록>을 봐야 할 오늘 날의 우리는 이 책을 외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방송에 등장한 가수 이적이 "(책에서)이순신 장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암흑과 같은 이야기"였다고 말한 것처럼, <징비록>의 역사는 외면하고 싶은 역사고, 처참한 역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 나라는 양식이 다 떨어져 백성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데, 또한 무엇을 믿고 구원병을 청하는가? 이미 너희 나라에 군량도 주지 않고 왜적에게 봉공도 거절하면 왜적은 기어코 너희 나라에 분노를 나타내어 조선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어찌 일찍이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 -<징비록: 국역정본>(273p)
명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고양겸이라는 자가 우리나라 군신들에게 쓴 공문에 적혀 있는 글 중 일부이다. 사신의 말을 그대로 <징비록>에 적어 내려간 유성룡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을 것이다. 전쟁 중 좌의정과 병조판서에 이어 영의정까지 역임하며 국난을 극복해 보려고 고군분투했지만, 돌아온 것은 북인(北人)들의 탄핵으로 인한 영의정 파직뿐이었던 그였기에, 그가 느꼈을 치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방송에서 설민석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제라도 <징비록>을 읽어야 할 이유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420년이 지난 오늘날의 동북아 정세가 임진왜란 당시의 동북아 정세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징비록: 국역정본>에서 유성룡의 원문을 완벽하게 번역해낸 이재호 선생은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만을 침략한 양국 사이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동아 전국(東亞全國)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조선,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외교관계와 전쟁의 추이를 기술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우리의 위기는 무엇일까?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가 <징비록>을 두 번째 책으로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서적: <징비록: 국역정본>유성룡 저/이재호 역온라인뉴스팀기자 onnew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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