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
장준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
장준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 주도로 국제연합(UN)이 조직되어 전후 국제 질서를 새로이 구축하고, 국가 간 자유무역을 통해 전쟁으로 피폐해진 세계 경제를 재건했다. 전쟁 이후의 자유무역 체제는 전쟁으로 자본과 인력의 손실을 입은 패전국 독일이나 일본마저도 막대한 무역수지를 통해 조기에 경제 회생이 가능하도록 했다. 특히 두 나라는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 되고, 자본과 인력의 손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확보한 우수한 국방과학기술 등을 바탕으로 기사회생하였고, 일본은 전쟁이 끝나고 불과 20여년만에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가 성장했다. 일본은 전후 자유무역주의 체제의 가장 큰 수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부적으로도 정경분리원칙을 바탕으로 정치 체제와 관계없이 무역제일주의를 늘 앞세웠고, 결과적으로 1980년대에 엄청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미국에 근접할 정도의 경제적 규모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이 오히려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하였고,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지속적인 '엔고(高)현상'을 겪으며 잃어버린 20년이라고 일컫는 장기불황을 겪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은 전자, 반도체, 조선업 등의 일부 산업에서 일본을 추월하였다. 지정학적, 역사적인 맥락 등에서 일본은 한국의 이러한 급속한 성장을 불안해했던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더불어 최근에는 문재인 정권에서 추진하는 북한과의 한반도의 평화협상이 미국의 지원으로 긍정적 방향으로 급물살을 타는 것으로 보이자,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의 성장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일본이 느낀 한반도에 대한 위기의식은 결과적으로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치적 갈등의 불씨가 경제분야로 넘어가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일본은 7월초 한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핵심소재 수출을 규제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과거사 문제 관련 한국정부의 조치에 대한 보복,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한 견제라는 본심은 숨긴 채, 전략물자의 무역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위장하여 대외 여론전을 구사하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의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핵심소재 공급을 막았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더구나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가)에서 제외하고 1천여가지가 넘는 전략물자에 대한 본격적인 수출통제에 나섰다. 이것은 단순한 수출제한이 아니고 양국의 자존심을 건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의미하며, 두 나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최악의 관계를 맞이하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직접적인 충격을 받는 산업계에서 현 상황에 대한 대책 마련에 몰두하고 있지만, 해결방법을 찾기가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과거에 일본에 당했던 침탈을 또 다시 반복할 수 없다며 끝까지 맞대응하려는 결연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산업계에서는 최고의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수십년동안 국제 분업 체제하에서 일본으로부터 소재, 부품에서부터 기계, 장비와 같은 자본재를 공급받아 우리의 제조업을 발전시켜 왔기에 이번 수출통제가 우리 산업계에 주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소재분야의 특성상 단기간에 모든 일본산 제품을 다른 제품으로 대체하기 어려우므로 우리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 해야만 한다. 한·일 갈등이 표면화 될 때마다 일본으로부터 원자재 공급 중단이 한국 산업계가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여겨져 나름의 대비책을 고민해왔지만, 막상 그 시나리오가 현실화 되자 대응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오히려 과거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당한 수출규제에 대한 그들의 대응을 검토하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2010년 센카쿠열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서로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여 양국간 정치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적이 있다. 당시, 중국은 세계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희토류 금속의 대일 수출규제를 단행하였는데, 희토류 원소는 전자기기와 에너지 저장장치 등에 필수적인 원소이기에,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조치에 냉정하게 대응하여 수입선 다변화와 기술개발로 2년 만에 중국 의존도를 반으로 낮췄고, 희토류를 적게 쓰거나 쓰지 않아도 되는 대체 소재를 개발하기 위한 국가적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수출규제 효과가 떨어졌고, 일본의 외교적 노력도 더해져 결과적으로 중국의 규제가 해제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외국 의존도가 높은 전략물자에 대한 경계심과 대비책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불과 10여년전의 중·일 분쟁이 이번엔 한·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며, 이번엔 일본이 공격자로서 중국보다 더 다양한 카드를 들고 있다. 일본의 이번 조치는 우리의 급소를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음은 뼈아픈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입은 이 상처를 차분하고 냉정한 대책으로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면 다시 찔러도 아프지 않을 두터운 딱지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성장에 어떻게라도 제동을 걸고 싶은 일본에게 우리 국민들이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으로 가득찬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국가가 보유한 자원을 총 동원하여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기술개발을 이뤄낸다면, 우리는 오히려 소재분야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적인 독립성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도발에도 이성적으로 국제 여론전 또한 면밀하게 준비해 나가야할 것이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이번 한일간 갈등상황이 글로벌 무역시장에서 한국의 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입지를 다지는 기회가 되는 사건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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