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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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하이난(海南) 하이커우(海口)에서 공산당 거물이 체포됐다. 그 곳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잡힌 사람은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과 함께 난창(南昌) 봉기를 주도했던 리숴신(李碩勳)이었다. 처형 직전 그는 부인이자 동지이기도 한 자오쥔타오(趙君陶)에게 유서를 남겼다. "곧 헤어질 것 같소. 나 때문에 너무 슬퍼마시오… 우리 아들 잘 키워주기를 바라오." 이 유서는 현재 베이징의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 그해 9월 5일, 고문을 당해 다리뼈가 부러진 리숴신이 감방 밖으로 끌려나와 2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리숴신의 유서에 나오는 '아들'이 바로 리펑(李鵬) 전 중국 총리다. 당시 리펑은 3살이었고 자오쥔타오는 둘째를 임신중이었다. 자오쥔타오는 체포의 위험 속에서 세 살배기 리펑과 유복자 딸을 데리고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41년 저우언라이 등의 주선으로 리펑은 13살 때 옌안(延安)으로 갔다. 옌안에서 리펑은 공산당에 가입했다. 17살 때였다. 신중국이 건국되자 당 중앙은 청년들을 선발해 소련에 유학보내기로 했다. 경제건설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리펑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싶어 유학을 꺼려했다. 모자(母子) 사이에 처음이자 마지막 충돌이 일어났다. 자오쥔타오는 리펑이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리펑은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소련 유학길에 올랐다.

1948년 리펑은 모스크바 동력학원에 입학해 수력발전을 공부했다. 1955년 귀국 후 리펑은 전력 관련 관리로 일하며 전형적인 기술관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전문지식과 성실성을 인정받은 그는 중국 전력공업부 부장을 역임한 후 자오쯔양(趙紫陽) 총리가 이끄는 국무원에서 부총리를 맡았다. 1988년 총리에 취임해 중국 최고 지도부로 올라섰다.



태자당(太子黨·혁명원로의 2세그룹)의 대표적 인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온 그였지만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가 터지면서 '악인'으로 전락했다. 당시 리펑은 학생들과 대화를 모색하던 자오쯔양의 반대편에 서서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지 아래 인민해방군과 탱크를 동원해 톈안먼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일을 총지휘했다. 이로 인해 영원히 뗄 수 없는 '톈안먼의 학살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됐다. 1996년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에는 수천명의 파리 시민들이 항의시위를 벌여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1997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되고 2003년 은퇴를 했지만 가족의 부패 문제 등으로 그는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베이징 소재 바바오산(八寶山)혁명공묘에서 리펑의 영결식이 열렸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비롯해 리커창(李克强) 총리, 리잔수(栗戰書)·왕양(汪洋)·왕후닝·자오러지(趙樂際)·한정(韓正) 등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과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등 전·현직 국가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톈안먼 광장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조기가 게양됐다. 영결식에 이어 시신이 화장되면서 91년의 긴 삶을 마감했다.

중국의 총리까지 했으니 리펑은 아버지의 염원대로 잘 큰 셈이다. 하지만 '영원무궁한 열사'라는 찬사를 듣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인색한 평가 속에 역사의 뒷편으로 쓸쓸하게 사라졌다. 이를 보면 리펑은 톈안먼사태의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였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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