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정경부 경제팀장
김승룡 정경부 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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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 "열심히 칼을 갈고 있다." 지난 23∼24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서 일본 측에 수출규제를 강력히 비판하고 돌아온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26일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 말이다. 일본의 터무니 없는 수출규제 조치에 불매운동 참여율이 65%를 웃돌 정도로 분노한 민심을 식힐 사이다 같은 시원한 발언이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선 '칼을 뽑으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솟는다. 칼을 뽑았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하지만 칼을 뽑는 것보다는 진작에 칼을 뽑을 수 없도록 만들었어야 했던 게 정답일 게다. 우선 과거를 통렬히 반성하고, 철저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지난해까지 54년간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 누적액은 약 708조원이다. 빠른 산업화로 고도성장한 우리나라는 일본의 소재부품과 기술에 의존하면서 그동안 단 한 번도 대일(對日) 무역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가별 무역적자에서 대일 무역적자는 240억8000만달러(약 28조5200억원)로 가장 높았다. 지금까지 대일 무역 누적적자의 3분의 2 가량은 소재부품 수입 탓이다. 소재부품 대일 무역적자는 2010년 242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지난해 151억달러 수준으로 감소했다. 소재부품 무역적자에서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품목은 메모리반도체와 디스플레이용 소재 부품이다. 알다시피 두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 제조국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15년 전부터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부품과 제조장비 국산화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4조원 짜리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3조원 가량의 소재부품, 장비를 수입한다. 이렇게 해서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한다고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수도 없이 얘기해왔다.

일본은 지난 4일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조치를 시행한 데 이어 전략물자로 쓰일 수 있는 1100여 민수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화이트리스트(수출 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법령 개정안을 내달 2일 각의에서 결정한다. 이렇게 되면 3개 소재가 아니라 수많은 소재부품과 제조장비 수입이 어려워진다. 3개월 이상 수입이 안되면 반도체 디스플레이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할 판이다.

2017년 기준 반도체 소재·장비 국산화율은 각각 18.2%, 50.3%다. 10년 전인 2009년과 비교하면 소재 국산화율은 50% 수준으로 똑같고, 장비 국산화율은 당시 약 20%에서 오히려 떨어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만 해도 국산화에 정부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됐지만, 이명박 정부 때 예산이 많이 삭감됐고, 박근혜 정부 때는 사실상 국산화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삼성, SK, LG 등 대기업이 세계 1위로 민간이 알아서 잘 하는데, 왜 정부 예산을 들여 소재부품, 장비를 국산화해야 하냐'는 게 당시 고위 공직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방심이 지금 일본의 작은 규제의 칼에도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이유다.

본지가 15년간 지속적으로 소재부품 국산화를 외친 것은 단순히 일본 의존도가 높기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20년 뒤, 30년 뒤 중국이 메모리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첨단 IT제품 1위 제조국이 됐을 때 우리나라는 중국에 부가가치 높은 소재부품, 장비를 수출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제조기술도 선진국에서 개도국·후진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를 일명 '테크 웨이브'라고 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기술이 미국에서 발원해 일본을 거쳐 한국, 대만, 중국 등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는 학설이다.

중국은 이미 LCD 디스플레이에서 세계 1위 제조국이 됐다.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메모리반도체에서도 1위 국가가 될 것이다. 반도체 생산기술의 범용화, 노동생산성 등으로 중국을 따라잡을 수 없을 때가 분명 온다. 그래서 소재부품 국산화, 원천기술 개발이 중요한 거다.

급한 발등의 불을 끄겠다고 정부가 매년 1조원 이상을 투입하는 소재부품 육성대책을 조만간 내놓는다고 한다. 급하게 불이 꺼지지도 않을 뿐더러 불을 끄고 난 후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무기로 수출강국,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것인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전통 주력 산업이 무너진 뒤 나라를 먹여살릴 차세대 산업육성을 차제에 함께 고민해야 한다.

김승룡기자 srkim@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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