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외교갈등이 점입가경이다.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과반석을 확보한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3종의 수출 규제에 이어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배제하는 카드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백색국가에서 제외된다면 최소 1100여개의 일본산 부품·소재가 규제 품목에 묶이게 된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경제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우리 정부는 최악의 국면을 피하고자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예정이고, 일단 WTO 일반 이사회에서 수출규제 논의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다. 물론 WTO의 논의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제 여론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어 국제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재 시점만 놓고 보면 일본이 먼저 공격을 시작한 만큼 WTO 제소에선 우리가 여러모로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한국이 백색국가에서 배제되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정부가 철저하게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왜일까. 시각을 바꿔보자. 일본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이번 한일 무역보복은 작년 10월 30일 한국대법원의 판결 때문이다. 대법원은 신일철주금 등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며 책임을 물었다. 이에 아베 총리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며 한국 대법원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일간 과거사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만 이전까지는 양국에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주로 미국이 중재에 나서 최악의 국면을 피했고 때론 일본 기업단체가 자사의 이익을 위해 일본 정부를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방치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재산권을 침해당했다며 자국 정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일본 수출규제가 자국 기업에도 피해가 발생하지만 이마저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일본은 재산권 침해를 당했다는 것이 이번 한일 무역분쟁의 본질인 셈이다. 아베 총리가 한국 때리기를 통해 참의원 선거에서 절반의 승리를 쥔 것도 이같은 이해관계가 작용했을 터다. 문제는 앞으로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강도는 더 세질 수도 있다. 설사 우리가 WTO 제소에서 승소해도 말이다. 한 경제 전문가는 "위안부라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전문가도 "양국 갈등의 원인은 결국 과거사 문제"라며 "이를 빼놓는다면 합의점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양국의 합의가 힘들다면 결국은 '경제'로서 일본의 백기를 들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수출규제는 우리뿐 아니라 일본에도 피해가 크다. 비록 이번 참의원 선거에선 승리했지만 한일 갈등이 장기화된다면 아베 총리의 지지가 지금처럼 계속 힘을 받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벌써부터 지역경제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와 민간, 시민단체 등이 각자 방식으로 일본에 압박을 가하거나 설득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일본이 주는 교훈이 뭔지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세계 1위 품목이라고 자부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일본업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 인고의 시간의 겪어야 하겠지만 편중된 제조업 구조를 개선하고 공급라인을 다변화하는 게 급선무다. 우리 경제가 성장을 거듭할수록 시기하고 비난하는 국가는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꼭 일본만이 아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유럽이든, 동남아국가든 누구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젠 특정 국가에만 의존하는 수출·수입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 신성장동력을 적극 발굴하고 내수를 통해 세계적 제조업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할 때다.
일본의 무역보복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느냐에 따라 추후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작금의 상황을 만들고, 일본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정부의 아마추어 대처반응이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한다. 채찍은 그 다음에 들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