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만 주면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끝없이 성장할 것 같았고 그래서 너도나도 나섰다. 다섯 곳 정도만 있으면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자금 선순환을 평생 돌게 하는 데 문제 없을 것이란 말도 나왔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한 듯 싶다. 시장 포화 논란 속 요즘 이만한 동네북도 없다. 올해로 3년 된 초대형 투자은행(IB) 얘기다.
초대형 IB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2017년 11월이다. 금융위원회는 당시 자기자본규모 4조원이 넘는 5개 증권사를 초대형 IB로 지정했다. 초대형 IB의 등장은 국내 금융투자업계와 기업금융 시장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IB의 주요업무인 기업금융 부문은 자본력과 전문성을 지닌 초대형 IB의 등장으로 새 전환기를 맞이할 것으로 봤다.
그로부터 3년 만인 올해 5개 국내 초대형 IB의 외형은 급성장했다. 정부의 증권사 대형화 유도정책에 대응한 일부 증권사 간 합병과 자본확충을 통한 대형화가 추진되면서다. 동시에 위험투자도 급격히 확대됐다. 발행어음 업무 인가 등으로 대형사 기업금융에 유리한 정책기조가 이어지면서 이들 5개사의 합산 우발채무와 직접대출 규모는 2016년 말 14조원대에서 작년 말 28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급하면 탈이 난다고, 이런 모습에 예서제서 초대형 IB들의 위험투자를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정부는 이를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정부는 최근 발행어음 인가사들이 조달한 자금이 정부의 희망과 달리 모험자본에 공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약 1년 반 동안 발행어음을 통해 조달한 자금이 9조원에 달하는데 이 돈이 대부분 대기업에 흘러갔다는 이유다.
시작은 지난달 26일 자유한국당 김종석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 요청해서 나온 초대형 IB 발행어음 투자 내역에서 비롯됐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말까지 발행어음 1·2호 사업자인 한국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이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은 각각 5조2641억원과 3조3499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두 회사가 발행어음을 통해 조달한 자금은 모두 상호출자제한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에만 갔지 스타트업·벤처기업으로 분류된 기업 투자는 없었다. 혁신기업에 대한 모험자본 공급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허용한 발행어음 사업의 애초 취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비판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초대형 IB로 선정된 증권사에 특혜처럼 허용된 발행어음이 제도 미비로 대기업·중견기업의 자금 조달 창구로만 쓰이고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춰지면서다.
이틀 뒤인 28일 정부가 가세했다. 금융위는 벤처지원 대책을 논의하자며 8개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임원들을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서 금융위는 벤처·중소기업 등 혁신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다시 주문하며 필요 시 제도 개선과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다.
발행어음 조달자금의 일정 부분을 벤처 등 비상장혁신기업에 쓰도록 한 것 자체가 틀렸다고 보는 증권사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미 모험자본 공급을 확대하고 있는데, 옥죄고 압박하는 정부에 할 말도 많다.
속을 들여다보면 실제 자기자본 3조원 이상 8개 증권사들의 모험자본 공급은 확대 추세다. 지난해 말 기준 이들 증권사들의 직접투자와 간접투자를 통한 벤처 등 비상장혁신기업에 대한 직접 투자금액은 1조1504억원으로 전년(3534억원)보다 세 배 이상 늘었다. 올 상반기만 벌써 6344억원을 들였다.
단기자금을 장기간 조달할 자금이 필요한 중소벤처에 투자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궁금하다는 업계다. 벤처투자에는 5~10년 쓰일 장기자금이 필요한데, 발행어음은 단기자금이다. 만기 미스매치는 불가피하고 되레 증권사 건전성만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정부에 맞서기 힘든 모양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들의 벤처기업에 대한 모험자본 공급 기능을 확대할 필요성은 공감한다"면서도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처음부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험부터 쌓으라며 발행어음부터 풀어준 게 맞다. 닭(경험)이 먼저냐, 계란(준비)이 먼저냐의 문제인 만큼 다시 뜯어봐도 결론이 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가 이제라도 벤처지원 제도 개선 필요성 여부를 검토한다면 공청회를 열어 근본적인 문제점부터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실효성 있는 증권사의 모험자본 공급 확대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첫 단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