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텍스'로 유명한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이하 고어)라는 업체가 있다. 좀 비싸다 싶은 등산복이나 등산화에는 웬만하면 '고어텍스'라는 마크가 붙어있다. 몇 년 전에 이 업체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이 회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냥 원단 잘 만드는 회사인가보다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스마트폰과 울트라북, 자동차, 심지어 수소전기자동차까지 다양하게 쓰이고 있었다. 사실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필름 형태의 얇은 멤브레인에 1제곱인치(약 6.45㎠)당 90억개가 넘는 미세한 구멍을 만들어 물이 들어오는 것은 막고 공기는 원활하게 배출하는 기술이었다. 1958년 듀폰 출신의 화학기술자 윌버트 고어가 설립한 이 회사는 이 기술로 미국 200대 비상장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에 수출하는 일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에 대한 수입 규제를 강화하면서 우리 제조업에 비상이 걸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직접 일본으로 출동할 정도니 상황의 심각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초미세 반도체 회로선을 그리는 EUV(극자외선 노광장치) 공정을 가동하려면 핵심소재인 포토 리지스트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 소재는 90% 이상 일본 업체에 의존하고 있다. 신에츠, JSR, 스미토모, 호체스트 등이다. 대부분 생소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공장을 세울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깨달았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뿌리 산업'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교훈을 줬다. 최근 일본 제조업이 다시 살아나는 배경 역시 탄탄한 뿌리 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도체와 TV 등 제품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밀렸지만, 소재에서는 일본의 점유율이 압도적이다. 이는 '작은 연못에서 큰 잉어를 잡는다'는 일본 특유의 '모노츠쿠리 문화'와 벨류체인 간 안정적인 상호연계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장인을 존중하는 일본의 모노츠쿠리 문화는 한 분야에서 오랜 연구기간이 필요한 소재 산업에 딱 맞는다. 예를 들어 도레이라는 일본 기업은 1970년대 탄소섬유를 개발한 이후 40년에 걸친 노력으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북미 업체들도 개발했지만 채산성 문제로 포기했었다. 하지만 도레이는 낚싯대, 골프채 등을 만들며 개량을 거듭해 지금은 주요 항공기 등으로 시장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여기에 소재부터 완제품 조립까지 자국 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경제구조 역시 일본이 소재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수요 업체와의 긴밀한 소통으로 제품개발 초기부터 같이 참여하는 전략을 구사해 가장 효율적이고 필요한 소재를 개발한 것이다.
이렇게 구축한 일본의 소재산업은 장기 저성장 터널에서도 경제를 지켜주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실제로 과거 세계 시장에서 '전자제품=일본'이었던 영광은 한국에 뺏겼지만, 그 한국의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는 여전히 일본이 장악하고 있다.일본은 소재 특허 등 자국의 원천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해외 합작을 배제하고 핵심 원재료의 배합 등을 블랙박스화 해 따라하지 못하도록 하고있다.
우리나라가 지난 54년 동안 700조원이 넘는 대일 무역적자를 기록한 이유는 일본의 소재·부품 경쟁력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소재·부품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매 정권마다 소재·부품 산업 육성이 항상 경제 활성화의 주요 항목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정부 주도 아래 고도 성장 목표를 달성하려다 보니 완제품 가공 중심의 시장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특유의 '빨리 빨리' 문화가 생기면서 소재산업 육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뿌리 산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전자·IT 시장에서 우리와 경쟁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가 중국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품목 역시 '중간재'다. 과거 일본과 우리나라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본에는 '핵심 기술'이 있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특히 최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가 소재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뿌리 산업의 경쟁력이 없다면 제조업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 위기다.
우리는 대기업 중심의 완성품 제조업체와 중소기업 중심의 부품·소재 업체로 이뤄진 소위 '갑을' 관계라서 핵심기술을 키울 만한 체력이 약하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의 대·중·소 상생 강화 움직임은 뿌리 산업 육성의 좋은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 아베 총리의 의도는 밉지만 만약 이번을 기회로 뿌리 산업을 키울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 큰 선물을 주는 셈이다. 과거 일본은 도자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이 나올 만큼 우리의 손재주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이는 '모노츠쿠리'보다 더 강력한 우리의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