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좋아 '기관장 공모(공개모집)'지, 위에서(청와대) 낙점한 사람을 자리에 앉히기 위한 '짜고 치는, 무늬만 공모 아닙니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공모가 정해진 기간에 맞게 진행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정해진 절차와 룰이 있는데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공모 아닙니까."
과학기술계 새 기관장 선임을 위한 공모와 그 과정을 보면 이런 말이 딱 와 닿는다. 정권이 바뀌어도 과학기술계에서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중 하나가 기관장 공모를 둘러싼 '정부 개입 의혹'이다. 과학기술계에서 익히 알려져 있는 일이고, 대다수 과학기술인은 이를 으레 인정할 정도로 관습화된 지 오래됐다. 그만큼 기관장 공모에 정부의 영향력과 입김이 절대적이고, 정부 개입을 의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분야의 공공기관장 선출도 매 한 가지다. 이처럼 기관장 선임과 공모 과정에 청와대, 정부 등 이른바 윗선의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작동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환경부와 협의해 산하기관 임원 인사에 불법 개입한 일명 '환경부 블랙 리스트' 의혹이 이를 입증한다. 과학기술계에선 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이 정부의 사퇴압박을 받아 법으로 보장된 임기를 채우지 않고 중도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는 폭로가 언론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사실, 다른 영역과 달리 과학기술계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기반으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특수한 공동체 집단이다. 이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당한 거리가 있고, 좀 더 자유롭다는 인식이 깔려 있어 정부의 관심이 적어 간섭도 적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 정부는 출범 때마다 과학기술 분야 기관장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경영역량, 글로벌 감각 등을 갖춘 인사가 선임돼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정부가 나서서 기관장 공모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정권 변화와 함께 새 기관장 선임이 이뤄질 때면 정부의 이런 약속이 유야무야되기 일쑤다.
더 심각한 것은 본격적인 기관장 공모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청와대에서 누굴 낙점했다더라", "정부 사이드에서 누굴 밀고 있다더라", "정권 핵심 실세와 친분 있는 인사가 공모에 지원해 나머지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등의 확인되지 않은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부가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을 통해 공모에 개입하고 있다는 개연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이런 '카더라 통신'의 소문들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전혀 예상치 못한 '가짜 팩트'를 낳아 조직 구성원 간 불신과 반목만을 키울 뿐이다. 과학기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 '웃픈 현실'은 이같은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결국 취재 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이런 소문들을 그냥 흘려 버리지 못하고 취재해야 하는 이유다.
29일에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대표하는 양대 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을 3년 동안 이끌어 갈 새 수장이 선임될 예정이다. ETRI는 지난해 12월 이상훈 전 원장의 임기가 끝난 지 3개월 만에, 원자력연은 하재주 전 원장이 지난해 11월 정부의 사퇴압박을 받아 임기를 채우지 않고 중도에 그만둔 지 4개월 만에 기관장 선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동안 두 기관 모두 기관장 공석인 상황으로,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공모 과정에서 정부의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우선, 정부는 기관장이 공석으로 남겨진 상황에서 뒤늦게 공모를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기관장 임기 3개월 이전에 공모를 시작해 전임 기관장 임기가 끝날 즈음에 새 원장이 최종 선임되는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 더욱이 공모 지원자 중 6배수를 거쳐 3배수 후보자가 가려진 시기가 ETRI의 경우 지난해 12월말, 원자력연은 올 1월 중순이었지만 두 달이 지나서야 신임 원장을 선임하려고 한다. 근 3∼4개월 가량 기관장 공백을 정부 스스로 자초하고 심지어 방치한 것이나 다름 없다. 출연연 관계자는 이를 두고 "정부의 직무유기요, 권력남용"이라고 격한 표현으로 비유했다.
균등한 기회와 공정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모 제도와 절차를 정부가 나서서 부정하고, 룰을 흐뜨려 놓고 있다. 특히 원장을 최종 선임하는 마지막 절차인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회가 열리기도 전에 "누가 낙점됐더라"는 얘기도 솔솔 흘러 나온다. 그게 사실이든, 추측이든간에 정부가 마지막까지 공모에 개입하고 있다는 흔적이다. 과기계 기관장 공모를 취재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