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골드만삭스'를 기치로 내걸고 국내 초대형 투자은행(IB)이 첫발을 뗀 지 올해로 3년 차를 맞지만, 그 꿈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글로벌 IB와 어깨를 견주겠다던 구호가 허망하기만 하다. 실현 여부도 아득하다. 50대 글로벌 IB에 국내 초대형 IB는 아직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무관심 속 제자리걸음만 이어간 탓이다.
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대우·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삼성증권·KB증권 5개 증권사가 초대형 IB로 지정된 건 지난 2017년 11월이다. 금융위원회가 2011년 자본시장법을 개정하고 초대형 IB 육성 계획을 발표한 지 6년 만이다. 당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내 시장 포화 속 IB 수익은 확대 추세였던 만큼 시대적 흐름을 타면서다. 덩치는 계속 커졌다. 2009년 2월 자본시장법 도입 당시만 해도 자기자본 2조3000억원에 못미치던 5대 대형증권사 평균 자기자본 규모는 지난해 5조3000억원 수준으로 2배 넘게 몸집을 키웠다. 그러나 글로벌 IB와 비교하면 그 걸음은 여전히 더디다. 조성훈 자본시장연구원 "당초 기대했던 수준에는 못미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실물경제가 활성화되고 기업투자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초대형 IB를 비롯한 금융투자업계가 기업금융에서 역할이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규제 놔둔채 덩치만 키우겠다는 당국…"육성 의지 의구심"= "초대형 IB라는 간판조차 무색한 지경입니다." 한 대형증권사 IB부문장의 자조 섞인 목소리다. 그는 금융당국의 초대형 IB 육성 의지에 의구심이 든다며 이렇게 말했다. 규제 옆, 또 다른 규제로 사실상 손발이 묶인 상황에서 신속한 비즈니스를 추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그는 "초대형 IB가 돼도 정부의 발행어음 인가를 받아야만 겨우 단기금융업에 나설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대주주 적격성 심사까지 받아야 한다"며 "다른 글로벌 IB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동안 한국 IB들이 여전히 두 번째 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유"라고 했다.
국제무대에서의 존재감도 미미하다. 국내 1위 증권사인 미래에셋대우의 규모(자기자본 기준)는 8조1600억원이다. 약 100조원에 달하는 골드만삭스와 아시아 1위인 일본 노무라증권(약 28조원)에 한참 못 미친다. 실탄이 부족하니 국내 초대형 IB가 글로벌 IB는 물론 국내에서 외국계 대형 금융사에 밀릴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진행된 대형 인수합병(M&A), 계열사 매각과 같이 돈 되는 딜을 모두 글로벌 IB가 휩쓰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초대형 IB 육성에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이는 금융당국에 대해 불만을 키우고 있다. 지난해 말 금융위원회가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발표한 12가지 혁신과제에 초대형 IB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초대형 IB를 여전히 '규제 대상'으로만 보는 금융당국의 시각도 초대형 IB의 시장 안착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국이 지나치게 소비자 보호에 집중하다 보니 금융사도 업계도 대형화 움직임을 주저하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당국 일각에서 계속해서 초대형 IB를 은행 수준으로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주장이 새어나오고 있어서다. 이밖에 금융산업이 은행 위주로 짜인 것 등도 장애물이다.
◇금융당국 '규제 옆 규제'…"성장 발목 잡는 요인" =금융당국의 과도한 규제는 성장 발목을 잡고 있다. 초대형 IB의 핵심 업무로 꼽히는 국내 발행어음 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요건을 갖춘 증권사가 인가를 받으면 자기자본의 200% 이내에서 만기 1년 이내의 어음을 발행할 수 있다. 즉, 초대형 IB 대열에 합류해도 발행어음 인가를 받아야만 발행어음 사업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발행어음 인가를 받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현재 초대형 IB로 지정된 5개사 중 발행 어음 인가를 받은 곳은 한국·NH투자증권 2곳에 불과하다. 미래에셋대우의 경우 공정거래위원회가 일감 몰아주기 의혹 조사를 하면서 발행어음 인가 심사가 무기한 연장됐다. KB증권은 옛 현대증권 시절 59조원 불법자전거래에 대한 징계로 인가를 받지 못했고 최근 재신청을 준비했지만 직원 횡령 사건으로 인가 신청이 미뤄졌다. 삼성증권은 작년 '유령주식 배당사고'를 일으키며 공격적인 사업에 나서지 못했다. 인가 지연에 국내 초대형 IB들은 무기 없이 시장에 선 셈이 됐다. 업계 관계자는 "업을 열어주지 않으면 공격적인 투자도 어렵다"고 말했다.
발행어음 인가를 받은 증권사가 적다 보니 국내 발행어음 잔액은 작년 9월말 기준으로 약 5조원 수준에 그쳤다. 결국 초대형 IB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자기자본은 공격적으로 늘렸지만, 늘린 자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덩치만 키우고 두 손 놓고 있는 탓에 영업용순자본비율(NCR)은 필요 이상으로 높아졌다. NCR은 증권사의 재무건전성 지표로 이 비율이 높을수록 자본 여력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국내 초대형 IB 5개사들의 작년 말 평균 NCR은 1687.4%에 달했다. NCR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축적 자금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