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전기차단 주변 카페서 잔업 영업사원 'GPS 족쇄' 인권 침해도 "형식적 복지 벗어나 문화로 정착"
국내 제약업계에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허울뿐인 워라밸이라는 지적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7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평소 야근이 많은 J그룹은 지난 2012년 매주 수요일마다 정시 퇴근할 수 있는 날을 만들었지만 정작 직원들은 정시 퇴근을 하지 못했다. 회사가 건물 전기를 차단해 불을 끄기도 했지만, 노트북PC를 들고 주변 카페로 이동해 잔업을 했다는 후문이다. L그룹도 오후 7시 경에 일제히 건물 조명을 끄지만 곧바로 다시 켜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 있다. 정시 퇴근을 목적으로 하지만 보여주기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부 제약사가 영업사원들의 위치를 회사가 파악하기 위해 도입하는 GPS 시스템도 단순한 근로 감시를 넘어선 인권침해라는 지적도 있다. 회사가 지급한 태블릿 PC를 통해 수시로 위치 정보를 송신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 Y사 모 영업사원은 GPS 조작 앱으로 거래처를 허위 보고했다가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는데, 회사가 기준으로 삼은 거래처 방문 일정이 과하게 책정돼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업사원당 60여 개 거래처를 월 4회 방문하도록 강요하는 일정을 현실적으로 소화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C사의 경우에는 육아휴직을 간 영업사원의 자리를 다른 영업사원이 채웠으나, 육아휴직을 마치고 해당 영업사원이 돌아오자 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원은 그만둬야 하는 일이 최근 발생했다. 육아휴직을 냈던 영업사원의 실적이 전국에서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회사 측에서 다른 사원에게 퇴직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근무시간은 대부분 9시 출근 6시 퇴근(9 to 6)을 표방하고 있지만 회의나 월례조회가 오전 7시 등 이른 시간에 잡히거나, 제약사 대부분의 휴가가 극성수기인 8월 첫주로 고정돼 있는 등 장기 휴가를 자유롭게 쓰기 어려운 문화가 정착돼있는 상태다.
육아 지원을 위한 어린이집 운영도 좀처럼 확산되지 않는 양상이다. 현재 제약업계에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대웅제약, 휴온스, GC녹십자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유아보육법에 따르면 상시 여성근로자 300명 이상 또는 상시 근로자 500명 이상이 고용된 사업장이면 사업주가 직장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운영해야 하지만, 외근을 하는 영업직군을 상시근로자에서 제외하거나 계열사로 인원을 나눠 육아 지원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탄력근무제 등을 시행하고 제약업계도 워라밸이 확산된다고는 하지만 오랜 업력 만큼 보수적인 곳들이 많아 쉽게 바뀌지는 않고 있다"며 "형식적인 복지에 그치지 않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문화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