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방대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지방대 붕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붕괴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은 학령인구의 감소다. 정원을 채우지 못한 대학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경향은 점차 심화될 것으로 현재 예측되고 있다. 여러 대책들이 마련되고는 있지만, 이에 대한 우려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대개의 대책들이 대학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도 대학이지만, 그 대학들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들도 그 우려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대학이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신축에 지역 상인들이 반발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 지역 상권 등이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 경우 대학에 대한 지역경제의 의존성은 훨씬 높다. 부실대학의 폐쇄, 대학 간 통합 등 지방대학의 이전이 현실화될 경우, 해당 지역의 경제는 그야말로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방대학의 붕괴는 비단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의 문제가 꼭 지방대학의 붕괴에서 연유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소멸의 경우처럼, 일자리의 공급을 의존할 수 있는 마땅한 공급처가 마련돼 있지 않은 지방의 소도시들은 젊은 인구의 유출을 막고, 젊은 인구를 유인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어 도태의 위험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지역의 규모가 크고 일자리의 공급처가 마련돼 있다고 해서 위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울산과 거제 등 한때 평균 연봉이 최고 수준에 달했던 규모가 제법 큰 산업도시들도 지역의 주력산업인 조선업의 장기 불황으로 인해 매우 심각한 정도의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매체들의 보도처럼, 한 산업의 장기 불황이 지역 경제를 거의 붕괴 수준으로 내몰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특정 산업에 대한 지역 경제의 의존성이 너무도 높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존성 문제는 울산과 거제 등에만 한정되어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된 여타 도시들의 소멸 위기 역시도 지역경제의 의존성에 기인하여 도래되는 것이다.

물론 의존성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이 문제는 지금의 산업시스템이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의 산업혁명 시기에 연원됐다. 산업 생산 방식의 근본적 변화가 이뤄졌던 당시 사회적 시선의 중심은 산업에 쏠려있었다. 이 같은 편향된 시선 속에서 그 변화를 수용해야하는 사람들의 삶과 활동은 고려 대상에 해당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산업과 경제 시스템은 인간이 그저 순응해야만 하는 환경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 환경 하에서, 인간의 사회조직은 환경인 산업 및 경제 시스템의 변화에 따라 변경되는 구조가 정착됐다. 이 시대에 주목했던 칼 폴라니가 오래전에 지적했었던 것처럼, 산업혁명 이후 인간 사회는 모든 면에서 경제체제의 부속물이 되어버렸다. 인간 고유한 활동이었던 노동 역시 이 시스템 내에서라야 행해질 수 있는 것이 됐으며, 이른바 노동시장은 노동이 수행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시장 속에서 노동은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고 제공되는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동을 토대로 지탱되는 것이기에, 노동사회는 산업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노동을 통해 생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다. 언제나 우리는 노동을 통해 생존해왔다. 하지만 역사적 의미와 달리 노동사회에서의 노동은 사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없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사회는 모두가 노동으로 평등해진 사회이며, 이 같은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경제적 수요의 하락은 인간의 삶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게 된다. 유일한 활동인 주어진 노동이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는 환경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어지는 노동이 인간의 유일한 활동인 한, 인간 활동의 다양성은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성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한에서 그 본질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환경의 순응 속에서 안정된 삶이 영위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그저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는 익숙함에 있어 두려움의 대상일 따름이다. 변화를 맞닥뜨려서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새로운 활동의 도모를 시도할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늘 다른 것의 가능성을 가려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역공동체의 붕괴와 도시소멸, 그리고 산업도시들의 현실 역시도 그 같은 순응과 의존성의 동일한 예이다. 단일 재배의 문제점처럼, 순응과 의존성이 높은 경우, 환경의 변화에 대한 탄력적 대응능력은 자연히 낮아지게 된다. 더욱이 단일재배의 실패를 또 다른 작물의 단일재배로 대체하는 방식은 문제의 반복과 심화일 뿐,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일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 최악의 상황은 그저 가능성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주목은 최소한 산업에 대한 것만큼은 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미래 역시 과거의 연장이 될 공산이 크다. 산업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우리 삶의 건강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변화를 감내할 만큼 우리 활동의 폭이 넓고 다양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인간의 활동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과 사회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람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 천명됐듯,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응에 있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 활동에 대한 연구를 중심에 세워야 할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여 물음을 던지지 않는 우(愚)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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