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IT·바이오·의료 기술 등 중심으로 R&D서 사업화까지 '창업 인큐베이터' 역할 기술 혁신과정 한곳에… 원스톱 생태계 구축 미래예측전문가단, 9대 전략 신사업 선정도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 10개 육성 목표"
■ 2017 리스타트 코리아 혁신생태계 해외서 배운다 - 러시아 현지취재 러시아의 실리콘밸리 '스콜코보 혁신단지'
스콜코보의 연구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개발한 신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스콜코보 이노베이션 센터 외부 전경.
스콜코보의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실험과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이고르 드로크도프 스콜코보재단 이사회 의장.
불과 5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의 택시는 악명이 높았다. 불법 택시가 허가받은 택시보다 더 많아 택시비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교통체증까지 겹치면 멋모르고 택시에 탄 여행객들은 엄청난 바가지 요금을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구글'로 불리는 포털 서비스 '얀덱스'의 스마트폰 택시 애플리케이션(앱)이 나오면서 이런 풍경이 사라졌다. 얀덱스 택시는 한국의 '카카오택시'보다 기능이 더 다양하다. 기본요금이 200루블(약 4000원)인 소형차부터 2000루블로 벤틀리 같은 최고급 승용차까지 이용할 수 있다. 택시에 타면 앱으로 현재 주행하고 있는 도로의 교통정보와 도착 예상 시간, 요금 등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신용카드를 등록해놓으면 따로 현금을 준비할 필요없이 자동으로 요금이 결제된다. 얀덱스 택시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50개 도시에 진출해 2015년 9억8400만루블(약 197억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지난해에는 1분기에만 4억4500만루블(약 89억원)을 기록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그동안 수출의 70%를 원유 등 원자재에 의존하던 러시아에 새로운 혁신 기반 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다.
◇"혁신 역량 집결해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 키우겠다"=지난달 20일 찾아간 모스크바 도심 서쪽 외곽에 위치한 '스콜코보 혁신단지'에서는 눈 덮인 부지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러시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스콜코보 혁신단지는 유가에 따라 출렁이던 취약한 러시아의 산업 구조를 첨단기술 중심으로 현대화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2010년 메드베데프 대통령(현 총리)의 승인을 받아 설립을 시작했다. 386만㎡ 부지에 3개 대학과 스타트업을 위한 사무실과 연구소, 대기업 입주 단지 등을 비롯해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거시설과 각종 교류공간, 골프장 등이 들어선다. 올해 MIT와 합작 설립한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 '스콜테크' 캠퍼스와 바이오 의료 클러스터에 들어설 병원 등의 공사를 마치면 주요 건설 계획이 대부분 마무리되고, 2020년이면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스콜코보 혁신단지는 다른 산업단지와 달리 차세대 에너지·정보기술(IT)·바이오 의료·원자력·우주 등 5대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개발(R&D)부터 기술사업화, 창업, 인큐베이팅, 투자, 대기업 협력까지 기술 혁신의 전 과정을 한곳에 모아 자체 생태계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현재까지 1400여 개의 스타트업과 보잉,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 IBM, 인텔, 지멘스, 삼성 등의 50여 개 글로벌 기업을 유치했다.
혁신단지가 외형적인 모습을 갖춰가면서 설립과 운영을 맡은 스콜코보재단은 내부 역량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단지 내에 있는 이노베이션 센터에 들어서자 복도부터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태블릿PC로 조종하는 물류 로봇을 시험하고 있었다. 연구실 안에서는 유리로 된 공간 안에 드론이 날아다니며 물건을 나르고 있고, 다른 편 연구실에선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실험이 한창이었다.
타이시야 야르마크 스콜코보재단 국제홍보 이사는 "로봇 연구실은 일본에서, 디스플레이 연구실은 핀란드에서 온 각 분야 석학이 연구 책임자"라며 "고가의 최신 연구시설을 갖추고 전 세계에서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콜코보재단은 이런 우수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첨단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혁신 기업들을 지원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러시아는 냉전시대 미국과 경쟁하며 쌓아온 막강한 기초·원천기술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이를 사업화해 산업으로 키울 기반이 없었다. 반면 1980년대 후반부터 구소련에서 이민 온 과학자들에게 창업을 독려한 이스라엘은 오늘날 벤처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고르 드로즈도프 스콜코보재단 이사회 의장은 "스콜코보가 처음 생길 무렵 러시아에는 아이디어와 의욕이 넘치는 유능한 젊은이들이 많았지만 이들의 재능을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인프라가 없었다"며 "이들에게 필요한 시설들을 한곳에 모아 국가가 중점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장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실리콘밸리와 달리 국가에서 인위적으로 시설들을 한곳에 모은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며 "하지만 지금은 한곳에서 모여 스타트업들이 다른 스타트업과 자연스럽게 얼굴을 맞대고 협력 기업과 투자자를 곁에서 바로 찾을 수 있는 물리적인 허브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200여 개 혁신 기업들이 입주한 스콜코보 테크노파크에선 벌써 다양한 스타트업들 간 융합의 불꽃이 튀고 있다. 쇼핑몰이나 전시회 등에서 사람들에게 홍보 자료를 제공하는 서비스 로봇을 개발한 '프로모봇'과, 안면인식 기술을 보유한 '비전랩스'는 이곳에서 처음 만나 함께 인공지능으로 얼굴을 인식하는 로봇 기술을 개발해 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재단이 R&D 시설과 투자 유치는 물론 각종 인증과 지식재산권, 법률문제 등을 원스톱으로 지원하면서 사업화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하반신 마비 환자의 보행을 돕는 외골격 로봇을 개발한 '엑소아트레트'는 지난해 임상시험을 거쳐 해외 진출에 성공했고, 무인창고 로봇 시스템을 개발한 '로보CV'는 삼성과 폭스바겐 러시아 공장에 제품을 납품했다. 이밖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고속 광통신망을 개발한 'T8'과 로봇 수술 시뮬레이터를 만든 '아이도스', 인공위성 개발 업체 '다우리아' 등은 스콜코보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미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매년 6월 스콜코보에서 2000여 개 러시아 스타트업을 소개하는 '스타트업 빌리지' 행사에 해외 투자자들이 전세기까지 동원해 몰려드는 이유는 이런 잠재력 때문이다.
이고르 의장은 "스콜코보 프로젝트는 러시아 중소기업의 혁신 역량을 발전시키고 결과적으로 대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스콜코보에서 10억달러의 가치를 지닌 기업을 탄생시키고 한국의 삼성, LG, 현대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 10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세상에 없는 산업에 투자한다"=러시아에서 창업이란 개념이 자리 잡은 지 채 10년이 안 됐지만, 이들의 목표는 매우 도전적이다. 자신들이 가진 기술 잠재력을 믿고 세상에 없는 신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새로운 강자가 되겠다는 것.
2006년 푸틴 대통령이 주도해 설립한 러시아벤처컴퍼니(RVC)는 민관 협력 펀드를 조성해 벤처기업 투자를 유치하고,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 투자 규모는 약 5억달러로 22개 펀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러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벤처 육성 정책의 대부분을 RVC가 주도해 실행하고 있다. 특히 RVC는 러시아 정부의 '국가 기술 이니셔티브(NTI)'의 사무국으로 전략 실행을 주도하고 있다.
2015년 러시아 정부는 기업가, 과학자, 투자자 등 600여 명으로 구성된 미래예측전문가단을 구성해 2030년까지 육성할 무인이동장치·무인비행기·인공지능·무인해상운송장치·스마트그리드·디지털의료·개인맞춤형 안전시스템·분산형 금융시스템·맞춤형 음식생산 등 9대 전략 신산업 분야를 선정했다.
모스크바 본사에서 만난 알렉산드르 포타포프 RVC 부대표는 "러시아 전체 벤처 투자의 80%가 IT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RVC는 개인 투자자들의 재정으로 운영이 가능한 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며 "대신 투자회수 기간이 길고 성공 가능성이 낮은 바이오를 비롯해 에너지, 신소재, 우주공학 등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RVC는 혁신 기업의 성장 속도를 높이기 위해 4500개 스타트업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경쟁하는 창업 경진대회 '제네레이션 S'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회를 진행하면서 선정된 스타트업은 엑셀러레이팅과 투자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우승한 기업은 스콜코보 혁신센터에 입주해 한 번 더 성장할 기회를 만든다. 스콜코보에서 주목받고 있는 프로모봇과 엑소아트레트 등이 이 대회 출신이다.벤처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국제협력도 RVC가 공을 들이는 사업 중 하나다. 주로 미국, 이스라엘, 싱가포르 등의 벤처 펀드 및 기관들과 협력해왔고, 한국의 여러 기관과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포타포프 부대표는 "러시아의 기초과학 역량 아이디어를 한국의 제품 개발력과 결합할 수 있다면 좋은 성과가 나올 것"이라며 "두 나라가 서로에게 필요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도록 공동 펀드 조성과 공동 연구 등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러시아와 다양한 과학기술 협력을 추진해 온 김상환 한국기술벤처재단 창업성장센터장은 " 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창업도시로 실리콘밸리와 함께 모스크바가 꼽히는 것은 러시아의 노력이 결실로 나타난 좋은 예"라며 "앞으로 한국과 러시아의 협력 방향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스타트업과 기술혁신 분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술기반 창업기업 간의 협력은 기술과 자본, 글로벌 시장 진출 경험의 공유를 통해 두 나라가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을 찾을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협력모델"이라며 "러시아의 첨단 원천 기술과 한국의 상용화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특히 ICT분야 협력이 가장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