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새 7만명 ↑… 응시생 64% 20대 선발 인원 줄어 경쟁률 '46.5 대 1' 노량진 학원가 평균월세액 13만원 음식 가격도 올라 경제적 부담 커 경기침체에 기업 신입채용도 줄어 청년 체감실업률 22.5% '최고수준' "일자리 대선공약 청년에 도움 안돼"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고시학원에서 취업준비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올해 9급 공무원 시험에 22만8368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46.5대 1에 달한다고 밝혔다.. 유동일기자 eddieyou@
■ 2017 리스타트 코리아 르포 - 최악의 실업난 : 청년들이 바라본 한국사회
체감온도가 영하 11도까지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저마다 칼바람으로 빨개진 손에 책 한 권이나 A4 크기의 종이 뭉치를 든 채 걸음을 재촉하기 바빴다. 걸어가며 출력물을 읽느라 아예 앞을 보지 않고 가는 이도 있었다. 9급 공무원 공채시험을 50일도 남겨놓지 않은 지난달 말 서울 동작구 노량진 풍경이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올 4월 8일 필기시험을 시행하는 국가공무원 9급 공채엔 총 22만8368명이 접수했다. 이는 역대 최다 수준으로, 2012년(15만7159명)과 비교해 5년 새 7만명 이상 늘어난 숫자다. 이 응시생들 3명 중 2명(64%)은 20대다. 14만6095명의 청년이 9급 공무원의 꿈을 꾸고 있다.
◇'두 달도 안 남았다' 긴장감 감도는 노량진= 시험을 채 두 달 남기지 않은 노량진 고시촌 일대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김모(28)씨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수험생들도 전보다 예민해진 것 같다"며 "독서실 안에서 패딩을 벗었을 뿐인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형광펜을 세게 긋기만 해도 시끄럽다는 내용의 항의 쪽지를 받을 정도로 수험생들의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커피 마시고 밥 먹는 휴식 공간도 '독서실화'돼가고 있다. 지난달 말 오전 노량진역 근처 한 카페엔 40여명의 손님이 있었지만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곳 손님 대부분이 수험생인 까닭에 저마다 음료를 시켜놓고 수험서를 읽거나 B4 크기의 모의문제지를 꺼내놓고 문제를 풀고 있었다. 독서대에 랩톱 컴퓨터를 올려 인터넷 강의를 듣는 이도 있었고 직접 가져온 담요를 둘둘 말고 공부하는 수험생도 있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이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직원은 "새벽에도 수험생 10명 정도가 자리를 지킨다"고 말했다. 인근 패스트푸드점에서도 한창 붐비는 점심시간에 혼자 공부할 거리를 가져와 읽으며 끼니를 때우는 수험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채용 계획 불투명해도 준비는 해야죠" 취준생 모인 강남도 '전운'= 노량진뿐 아니라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의 강남역 일대에 있는 청년들도 분주한 모습이다. 기업들의 상반기 대졸 신입사원 공채를 앞두고 있어서다. 이 일대엔 토익 등 '스펙' 쌓기를 준비하는 어학원과 취업학원이 몰려 있다. 학원이 밀집된 한 골목엔 수업이 끝날 때마다 수십 명의 인파가 2m 넘는 폭의 인도를 가득 메운다. 이 학원에서 토익 수업을 듣는 한모(25)씨는 "3월 공채 때 토익 점수를 내려면 빨리 안정적으로 점수를 받아놔야 한다"며 "이미 토익 점수가 있긴 하지만 더 높이려고 또 (시험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소개서 작성과 인·적성 시험, 면접 등을 준비하는 취업학원도 공채 준비에 한창이다. 이들은 많은 대기업이 3월에 공채 원서 접수를 하는 점을 고려해 자기소개서를 무한 첨삭해주는 등의 맞춤형 강의를 내놓고 있다. 공기업 입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한 취업학원에서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는 김모(27)씨는 "첫 취업 준비인 만큼 정보가 부족해 학원에서 강의를 듣기로 했다"며 "올해 상반기부터 원서를 넣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열심히 해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 '공시(공무원 시험)·취업의 계절'을 맞아 준비생들의 긴장감이 더해가고 있지만, 이 중 합격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 9급 공무원 시험엔 22만8368명이 지원했지만 뽑는 인원은 4910명에 불과하다. 경쟁률이 46.5대 1에 달한다. 준비 인원이 늘면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장수생' 수험생의 수도 늘어가는 추세다.
취업도 사정이 어렵긴 매한가지다. 경기 침체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다. 청년들이 선호하는 주요 기업이 채용 계획을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국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올 상반기 4년제 대학 졸업 정규 신입직 채용계획에 대해 설문한 결과, 조사에 응한 312개사 중 34.3%(107개사)만이 대졸 신입 공채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44.6%(139개사)는 아예 신입 채용계획 자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대 그룹 중 현재까지 상반기 채용 계획을 확정한 곳은 SK, 현대차, LG 정도다. '채용시장 큰손' 삼성 역시 상반기 채용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만 나올 뿐 규모나 공채 형태 등에 대해 확정된 바가 없는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 앞으로가 더 문제= 문제는 이런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올 1월 통계청은 청년층의 체감실업률이 해당 통계 집계 후 최고 수준인 22.5%에 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망은 더 어둡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올해 노동시장에 대해 "상반기까지 조선업을 중심으로 제조업 구조조정 이슈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고, 경기 둔화 양상도 지속될 것으로 보여 취업자 수 증가에 하방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장래성 있는 일자리가 필요한 청년층을 중심으로 실업자로의 진입 또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도 "올해 2월 대학 졸업생을 시작으로 당분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청년 취업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험과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경제적 부담도 커지고 있다. 서울시는 청년층의 경우, 노량진이 속한 동작구의 3.3m²당 평균 월세액이 13만원으로 시내 자치구 중 가장 높다고 발표한 바 있다. 라면 등 서민 먹거리 물가 상승이 계속되는 것도 소득이 없는 청년들에겐 큰 짐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손에 잡히는 정책'이 필요한 때= 이 같은 고용시장을 고려해 최근 대선 출사표를 던지는 정치인들도 저마다 관련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진짜 손에 잡히는 정책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청년들의 지적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올라와 노량진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모(24)씨는 "학원비와 책값이 많이 드는 것이 가장 힘들다"면서도 "서울이나 경기도는 청년수당 같은 제도가 있지만 경상도는 그런 것이 없어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전부 의존하고 있어 죄송할 따름"이라고 털어놨다.
일자리 수를 늘리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주자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상반기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김모(28)씨는 "정치인들이 몇백만 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그중 구직자들이 원하는 규모 있는 회사의 정규직은 극소수일 것"이라며 "보여주기식으로 저임금·비정규직 등 질 낮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기보단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