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조성 일본 최대 바이오·의료 클러스터 기업·의료·연구기관 걸어서 10~15분 거리에 밀집 기초연구부터 중개·임상·상용화 전주기 지원체계 재생의학·혁신신약·의료용 로봇 기술 등 집중 육성 유도만능줄기세포 등 혁신기술 개발·상용화 집중 iPS 세포 이용 재생의료 상용화 기간 2년으로 단축
고베 바이오메디컬 이노베이션 클러스터(KBIC) 전경. 클러스터에는 도보 10~15분 거리에 대학과 연구소, 기업, 병원 등이 밀집해 있어서 기초연구와 중개연구, 상용화에 긴밀하게 협업한다.
일본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4명을 배출한 기초 연구 역량과 세계 2∼3위권의 제약·의료기기 시장을 보유한 전통적인 바이오헬스 강국이다. 일본 1위 제약사인 다케다의 지난해 매출은 약 1조8000억엔(약19조4000억원)으로, 한국의 96개 상장 제약사 매출을 모두 합친 금액(약 16조원) 보다도 크다. 의약품뿐만 아니라 의료기기에서도 일본은 세계 10대 수출국으로, 올림푸스와 도시바, 테루모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도 결코 방심할 순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14년 일본 의약품 산업 무역수지 적자는 1조8600억엔(약 20조원)에 달했다. 2007년 7040억엔에서 두 배 넘게 늘어난 수치로, 그만큼 국제 경쟁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기기 산업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같은 해 8000억엔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이런 위기감은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까다로운 규제, 기초연구 성과의 더딘 상용화로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높은 기술력을 뒷받침하던 기초생명과학 연구마저 국제 경쟁력 순위가 점차 하락하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흥국 시장 진출마저 경쟁국에 뒤처지면서 일본 바이오헬스 산업은 새로운 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이에 일본 아베 정부는 2013년부터 건강·의료산업 육성을 '일본재흥전략'의 한 축으로 삼아 전 부처가 참여하는 '건강의료전략추진본부'를 내각에 설치하고, '건강의료전략'과 '의료분야 연구개발에 관한 종합전략' 등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먼저 약사법 개정을 통해 의약품·의료기기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재생의료법'을 제정해 줄기세포 치료제 상용화를 위한 포석을 마련했다. 이어 지난해에는 각 부처에 분산된 의료 관련 연구개발(R&D) 기능을 모아 총괄하는 '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AMED)'를 설립해 기초연구부터 중개·임상연구, 상용화 연구까지 전 주기를 지원하는 새로운 체계를 갖췄다.
◇산·학·연 모여 혁신 의료기술 상용화 '집중'=지난 5일, 고베 공항에서 도시 중심부로 가는 모노레일을 타고 인공섬 '포트아일랜드' 위에 연구소와 기업, 병원 등이 가지런히 들어선 '고베 바이오메디컬 이노베이션 클러스터(KBIC)'에 도착했다.
KBIC는 역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반듯하게 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클러스터 북쪽에는 고베시립중앙시민병원과 니시메모리얼재활병원, 효고현립아동병원 등 의료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 중심부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RIKEN)와 KBIC의 운영을 담당하는 첨단의료진흥재단(FRBI)이 설립한 첨단의료센터(IBRI) 등 연구 기관들이 입주해 있다. 또 서쪽에는 바이오메디컬 창조센터(BMA)와 의료기기 개발센터(MEDDEC), 국제 비즈니스 지원 센터(KIBC) 등 각종 지원 기관과 기업들이, 남쪽에는 고베 대학과 효고 대학, 고베가쿠인 대학 등 교육 기관에서 세운 시설들이 자리한다. 기초연구부터 중개·임상 연구, 상용화에 이르는 모든 '산·학·연·병·관' 시설들이 걸어서 10∼15분 거리 안에 모여있는 셈이다. 또 위쪽으로는 고속철도인 신칸센이, 아래로는 항만과 공항이 위치해 수출입이 편리한 입지와 교통시설을 갖췄다.
눈에 띄는 시설은 남쪽 끝에 위치한 RIKEN 컴퓨터사이언스연구소(AICS)다. 이곳에는 2011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였던 RIKEN의 슈퍼컴퓨터 '경(京)'이 자리해 슈퍼컴퓨팅을 이용한 신약 후보 물질 발견과 재설계 등을 지원한다. 연구소에서는 경을 통해 혁신 신약 개발에 필요한 10년의 연구개발(R&D) 기간과 1조원의 비용을 20%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ICS 옆으로는 내년 완공을 목표로 고베메디컬혁신센터(KCMI)가 한창 공사 중이다. 이곳에선 연구소에서 나온 성과들을 벤처기업이 제품화하는 연구와 차세대 슈퍼컴퓨터 R&D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1995년 대지진으로 6400명의 사망자와 6조9000억엔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은 고베시는 1998년 황폐해진 도시와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21세기 유망 산업인 의료 관련 산업에 주목하고 KBIC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KBIC는 메사추세츠종합병원과 MIT, 하버드 등 유명 대학과 병원을 중심으로 벤처 기업 등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미국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 등과 달리 처음부터 정부 주도 아래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클러스터다. 먼저 R&D 기반을 만들기 위해 고베 의과대학을 비롯한 대학과 연구기관에 입주를 요청하고, 2단계로 지자체와 재단이 직접 중개연구를 담당할 연구센터와 각종 지원 기관들을 설립했다. 마지막으로 전국의 기업 및 의료기관들과의 협력을 추진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췄다. 최근에는 클러스터 입주 기관 간의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과 생태계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재생의학과 혁신 신약, 의료기기와 의료용 로봇 기술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일본 최대 바이오·의료 클러스터로 자리 잡은 KBIC 덕분에 고베시는 지난해 1615억엔(1조7000억원)의 경제적 효과와 56억엔(약 600억원)의 조세수입을 거뒀다.
2001년 18개 기업이 입주를 시작한 KBIC에는 현재 베링거잉겔하임 등 다국적 제약사를 비롯해 제약, 의료기기, 재생의료 등 관련 기업이 330여 곳이 입주해 기업 종사만 7200명에 달한다. 한국에선 화장품 회사로 잘 알려진 '시세이도'가 이곳에서 모발 재생 연구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벤처 기업이 전체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이 곳 입주 기업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클러스터 네트워킹 미팅'에 참여해 첨단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와 사업 연계를 논의하는 등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류지 히라마츠 FRBI 글로벌 책임자는 "우리는 재생의학에 중점을 두고 혁신적인 치료제 개발과 임상 시험의 세계적인 허브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KBIC는 재생의학과 신경과학, 암 연구 등 기초과학 분야에 많은 강점을 갖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중개 연구와 임상 시험, 상용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베 바이오메디컬 이노베이션 클러스터 내에 위치한 이화학연구소(RIKEN) 발생·재생과학종합연구센터(CDB) 전경.
고베 바이오메디컬 이노베이션 클러스터 내 이화학연구소(RIKEN) 컴퓨터사이언스연구센터(AICS)가 가동중인 슈퍼컴퓨터 '경'.
◇세계 최초 iPS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 '총력'=KBIC 중심에 위치한 IBRI는 연구소와 병원으로 이뤄져 의료기기(R&D)와 의약품 임상연구, 재생의료 응용 등 3가지 분야에서 기초부터 임상까지 중개연구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시설이다. 이곳은 2014년 다카하시 마사요 RIKEN 발생·재생과학종합연구센터(CDB) 박사 주도로 유도만능줄기세포(iPS)로 만든 인공 망막을 삼출성 황반변성 환자에게 이식하는 세계 최초의 임상시험이 이뤄져 주목을 받았다.
이 임상시험이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KBIC의 협업 인프라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2012년 야마나카 신야 교토대 교수가 iPS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일본 정부는 세계 최초로 iPS 치료제를 상용화하기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4년에는 '재생의료법'을 제정해 iPS 세포 등을 이용한 재생의료 분야 신약을 안전성만 확인하면 조기에 판매할 수 있게 해 상용화에 걸리는 기간을 최대 10년에서 2년으로 줄였다. IBRI에서 이뤄진 iPS 임상시험의 경우 한 건 당 약 10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전에는 이런 iPS 세포 치료제를 기존 의약품과 같이 대규모 임상시험을 거쳐 허가를 받는다는 건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재생의료법 제정으로 소규모 연구소나 벤처 기업도 재생의료 신약을 상용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일본 정부가 재생의료 상용화를 서두르는 이유는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는 고령화와 연관이 깊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65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6.7%로, 2025년이면 30%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의료비는 이미 일본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 2014년 일본 국민이 의료기관에 지급한 치료비 총액은 8년 연속 증가세를 보이며 40조871억엔(약430조원)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연간 예산인 100조엔의 약 40% 수준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의료비를 절감하고 국민의 건강수명을 늘리는 혁신적인 첨단 의료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고, 그 최전선에 재생의료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의 중증 심부전 환자는 약 30만명으로, 이들의 투석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은 한 사람당 약 500만엔에 달한다.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인 줄기세포 이식 치료법이 상용화되면 당장 1조5000억엔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또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인 당뇨병 시장은 1조2000억엔, 치매 시장은 1조9000억엔에 달한다.
고베시가 속한 간사이 지역은 지난해 아베노믹스의 핵심 성장전략 중 하나인 '국가전략특구' 중 '의료 이노베이션 거점'으로 선정돼 이 같은 재생의료 신약 개발이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 지역에는 의료 관련 연구기관과 기업이 집적한 KBIC를 비롯해 유도만능줄기세포(iPS) 등 세계적인 재생의료 연구로 이름난 교토대학 등이 자리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규제 완화 혜택을 받으며 재생의료 임상 연구와 상용화를 추진할 예정이다.
류지 책임자는 "KBIC에서는 재생의료 분야 생태계 구축을 위해 40∼50여 개 입주 기업이 참여하는 '재생의학 컨소시엄'을 구축하고 있다"며 "기존 재생의료 관련 기업뿐 아니라 다양한 기술적 배경을 가진 산업군에서 참여해 협업하는 생태계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까운 시일 내에 iPS 세포 치료제 등 혁신적인 제품이 나와 커다란 성공을 거둔 기업들이 여러 곳 생겨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들 재생의료 투자 확대=일본 정부가 재생의료 발전을 위한 포석을 마련하자 기업들도 이에 부응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도쿄 니혼바시를 중심으로 재생의료 산업화를 추진하는 산·학·관 협의체 '라이프 사이언스 이노베이션 네트워크 재팬(LINK-J)'에는 일본 최대 부동산 기업인 미츠이 부동산이 참여해 재생의료 관련 기업과 연구소 등이 입주할 '라이프 이노베이션 센터'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재생의료법 발효 이후 일본 재생의료 활성화 위한 산업협의체인 '재생의료이노베이션포럼(FIRM)'의 신규 가입 신청 기업의 3분의 1이 외국 기업일 정도로 해외 기업들의 진출 의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차바이오텍, 메디포스트, 알바이오 등의 줄기세포 전문 회사들이 현재 일본에 진출했거나 현재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 진출한 국내 줄기세포 업체 관계자는 "재생의료가 보편화되면 기하급수적으로 시장 커질 것"이라며 "일본이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 재생의료에 대한 규제 완화에 나섰지만, 한국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화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기술력으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