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놀라운 기술이다. 가로 세로 1㎝ 내외의 작은 칩 안에 머리카락 굵기의 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전선을 촘촘하게 배치해 사진이나 음악, 문서를 저장하거나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고 판단을 내리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기술이 현대 문명에 얼마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1946년 미국에서 개발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을 보면 알 수 있다.
에니악은 1만 8000여개의 진공관을 사용했었는데, 무게는 27톤, 면적은 40평대 아파트와 비슷한 규모였다. 에니악을 가동하려면 150㎾의 전력이 필요했었는데, 전원을 켤 때마다 필라델피아 도시 전체의 조명이 잠시 흐릿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성능은 사람보다 약 2000배 빨리 계산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낮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반도체 기술의 덕택에 이러한 거대한 컴퓨터가 하던 일을 최근에는 손톱만한 칩이 대신할 수 있게 되었고, 10년 전만 해도 퍼스널 컴퓨터(PC), 사진기, 캠코더, MP3 플레이어 등 각기 다른 제품으로 발전해오던 다양한 제품들이 이제는 스마트폰이라는 하나의 제품으로 통합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 PC, 사진기 등의 수요는 정체됐고, MP3 플레이어는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스마트폰 덕택으로 온라인으로 신문이나 책을 쉽게 볼 수 있게 됐으며, 영화, 음악, 게임 등 각종 엔터테인먼트도 쉽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반도체의 활약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금년 초 다보스 포럼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는 보다 지능적인 사회로의 변화'로서 4차 산업혁명이 논의됐다. 모든 사물이 하나로 연결될 사물인터넷(IoT), 이를 활용해 수집된 빅데이터,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다가올 것이다. IoT, 빅데이터, 인공지능기술 등이 다양하게 응용되면서 보다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수요가 꾸준히 늘어날 것이고, 정보의 판단, 처리, 가공 기능을 담당하는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 필요성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의 메모리 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 산업은 아직 초보 수준이다. 메모리 분야의 기술혁신과 선제적 투자로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모리보다 훨씬 시장규모가 큰 시스템 반도체산업을 빨리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수요에 맞는 설계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설계된 칩을 생산하는 경쟁력 있는 파운더리, 반도체 장비와 소재 기업 등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도 R&D, 인력양성 등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수요·설계·생산 기업들이 협력해 선순환적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위해 뜻을 모으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지난 10월 27일 반도체의 날에 메모리 대기업과 금융계가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는 반도체전용펀드를 조성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 펀드는 이 분야의 주역인 설계기업, 장비·소재기업 등에 주로 투자돼 선순환적 생태계를 만드는 씨앗이 될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당당히 홀로 서고, 미래를 향해 질주할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