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뜨겁다. 기온이 뚝 떨어진 주말. 29일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는 이를 방증하기에 충분했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파문 이후 첫 주말을 맞은 29일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촛불시위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는 대학생, '넥타이 부대', 노인층, 유모차를 끌고 아기를 업은 주부까지 다양했다. 문화재 관련 저서를 집필한 이모씨(60)는 "국기 문란으로 국정이 마비됐다. 이 엄청난 불의를 보고도 저항하지 않는다면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집회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직장인 정모씨(46)는 "대학 때 이단 옆차기를 차면서 나가라는 데모현장에 안나갔다. 난 좌도 우도 아니다.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왔다"고 했다. 61세 노선배가 광화문 집회 하루 전날 밤 11시쯤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가 결연했다. "난 내일 꼭 나가서 국민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청년들은 안나와도 돼. 내가 대신 나가겠다. 청년실업은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잘못이다. 청년들에게 부끄러운 세상을 물려준 죄값을 이걸로라도 치러야겠다."
평소 시위에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들까지 나선 것은 최순실 씨를 비롯한 극소수 집단이 "국가 안보 문서까지 열람하고, 문화예산까지 분탕질하는 등 전방위로 국가 정책을 농단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와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성숙된 시민의식 때문이었다. 청와대 주변에서 '몸통들의 일탈'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김영란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러 피켓들이 눈길을 끌었다. 갈겨쓴 '이게 나라냐'는 종이 피켓, 또박 또박 정서한 '피로 세운 민주주의 더럽히지 마라'는 피켓에서부터 며칠 전 광화문에서 본 '최순실은 박근혜 사퇴를 지시하라'는 것까지 메시지마다 뜨거운 분노가 담겨있었다. "창피해서 해외도 못나가겠다." "미치겠다. 일이 손에 안잡혀서 나왔다." "국민만 불쌍하다. 절망을 넘어 무력감을 느낀다." 연설문 내용까지 고쳤다는 '최순실 국정농단의혹 사건'은 국민 자존심에 깊디 깊은 상처를 입혔고, 삶의 의욕까지 감퇴시켰다.
의혹의 핵심인 최순실씨가 영국을 통해 30일 전격 입국했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심야에 청와대 비서진의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했다. 검찰도 29일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이 모두 둑이 터져버린 민심을 의식한 행보다. 하지만 청와대는 29일 검찰이 안종범 정책조정수석비서관과 정호성 부속비서관의 청와대 사무실 압수수색 집행에 대해 협조를 거부했다. 의혹 사건이 터져나온 지 며칠이 지나면서 벌써 많은 증거가 인멸됐다고 봐야 한다. 의혹에 얽힌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 언론 보도를 부인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진 사표 제출, 최 씨와 측근 귀국이 치밀한 시나리오 아래 짜여진 느낌이다. 아프다고 검찰 소환을 하루 미뤄주다니, 말이 되는가. 국민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최순실 씨 국정농단 의혹 사건은 현직 대통령이 직접 연루된 헌정사 초유의 사태다. 국민들은 '검찰의 청와대 압수 수색이 변죽을 울리고 있으며, 대통령은 진실을 숨기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최순실 게이트의 많은 증거들이 폐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만이 국정 마비 사태의 장기화를 막을 수 있다. 국민을 절망에 빠지게 한 이번 사태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성역이 있을 수 없다. 박 대통령도 "나를 수사하라"고 스스로 밝혀야 하며, 청와대에 대한 한 점 의혹 없는 검찰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사초(史草) 게이트'이기도하다.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친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역사관을 담는 사초(史草)에 함부로 손을 댄 것과 같다. 게다가 대통령 연설은 나라의 얼굴이다. 이를 일개 개인이 조목조목 뜯어보고 고쳤다니, 대통령의 '90초 사과'도 30분전에 미리 녹화한 것을 방영했다니, 이런 국민 우롱이 다 있는가. 당나라 현종을 우매한 황제로 만든 환관 고력사는 그리했다. 고력사는 관리들이 황제에게 올린 글을 중간에서 열어보고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걸러냈고 측근의 많은 관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 꼴을 보고만 있었다. 박 대통령이 그동안 서면보고만 고집하고 주요 장관들조차 TV에서야 대통령의 얼굴을 봤다는 이상한 상황들의 수수께끼가 이제야 풀린다. 간신들이 득세하며 사리만 챙기는 세상에서는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진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해일처럼 넘쳐나는 내용 중 '사익 동맹 집단'이 독수저를 문 이상 흙수저들이 뒤집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이것은 엄중한 심판을 의미한다. 당나라 태종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위징(魏徵)이은 태종에게 강직한 직언을 해서 애를 먹였다. 그가 태종에게 간언한 것 중에 '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라는 말이 있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을 세우고, 대통령을 교체할 수 있다. 사태가 심각하다. 대통령은 1974년 5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의 빠른 결단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의 측근 비서가 동독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5일 뒤 전격 사임했다. 사건의 성격은 다르지만 측근 비리로 국정 마비 상황이 왔다면 빠르게 결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도(正道)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책임 총리와 거국 내각으로 위기를 수습해나가야 한다. 대통령은 내치에서 손을 떼고 여야 합의로 추대한 새 총리가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 대통령의 '결정 장애 현상'으로 대한민국이 가라앉는다면 씻지 못한 죄책이 될 것이다. 경제가 침몰해선 진상 규명 노력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이 와중에 우리 국민들은 냉철해져야 한다. 각자의 임무를 다하면서 시민정신이 위대함을 입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