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비선실세와 연설문 등 국정자문을 받은 것을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것은 대통령 스스로 대통령기록물을 불법적으로 유출했다는 의혹과 함께 자격이 없는 사사로운 개인이 국정을 농단했을 개연성이 높아져 실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미르 및 K스포츠재단의 비리를 차치하더라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가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대통령의 권력누수는 물론 권력공백 상태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관리 자체가 무너져 버리게 되었으니 가히 국가비상사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만기친람으로 일관하여 시스템의 작동보다는 개인적 권위에 의존해왔고 수첩인사라는 사적 연결망에 의존하는 인사를 함으로써 탕평책을 통한 직언할 수 있는 인사의 등용을 소홀히 해왔다. 대통령의 지시가 없어도 자발적 또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부서는 사라지고 모두가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위기 때마다 콘트롤 타워 부재로 우왕좌왕하다 상황은 끝나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시스템 전체가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음에도 모두가 방관만 하다가 종국에 터지고 만 것이 바로 최순실 사건이다.
대통령은 반만 사과했지 최순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사과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까지 밝혀진 것 이상으로는 수사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을 정해준 것 같기도 하다. 대통령의 비선실세 문제는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 모두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의 심각성은 국가관리 시스템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 앉았다는데 있다. 청와대 보좌진이 집권 일년이 지나도록 갖춰지지 않아 비선 라인의 조언을 구했다는 것은 일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다. 4.13 총선 과정에서 친박 아첨꾼들이 진박 감별에 나섰을 때 묵인으로 일관한 것도 사적 충성자를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면 공적 시스템은 와해되고 부조리와 부패가 싹트기 마련이다.
경제 절벽과 안보 위기 그리고 국정 파탄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도 보이지 않는 절박한 상황이다. 진상 규명과 더불어 새로 드러날 의혹의 진실공방 그리고 탄핵을 포함한 책임 추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난국을 극복할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일단 진상 규명을 철저히 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실을 은폐하려거나 처벌을 모면하려고 한다면 국가 기강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여기에 정치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여 정략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국가위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국민은 이러한 정치인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보여준 국민의 놀라운 이성적 판단은 앞으로의 대선 및 총선에서 여지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공국가의 기틀이 국민으로부터 나왔던 것처럼 위기극복의 실마리도 국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음에 정치인들은 유의해야 한다.
국민들이 이 시점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실추된 국가 권위를 하루 빨리 되찾는 것일 것이다. 그 첫 걸음은 대통령이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특검에 의해 밝혀지는 것보다 훨신 명예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스로 원칙과 신뢰를 좌우명으로 삼는 대통령의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른 대통령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측근 실세의 비리 부재였으나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권위주의 권력일수록 비공식 채널 즉 비선라인에 의존하기 마련이며 민주적일수록 공식적이고 투명한 채널을 사용한다. 나머지 진실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와 함께 투명한 공식채널을 활성화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