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선 약관에 "분실·해킹 우리 탓"
국내는 "결제정보 유출 소비자 책임"
카드·간편결제 사고 방지 FDS솔루션 투자 활발
페이팔, 1000분의 1초 단위 거래 모니터링·분석
국내는 수상한 거래 봐도 '원칙 준수' 부담 전가



"고객은 책임질 필요 없다. 대신 우리가 책임진다."

소비자 권익 보호가 발달한 북미지역에서는 'Zero-liability'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객의)책임의무 없음' 정도가 되겠네요. 비자, 마스터카드 등 유명 카드사를 비롯해 씨티그룹, 웰스파고은행 등 주요 금융사는 이를 당연히 여기며 약관에 명시하고 이를 위해 상당한 IT 인프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기존 금융권에 그치지 않고 페이팔과 같은 새로운 간편결제 업체도 역시 이를 준수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고의적인 행동이 아닌 이상 소비자에게 분실, 도용이나 해킹에 따른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어 제도로 정착했습니다. 소비자는 자기 자신의 계정 정보를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는 것 말고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사업자는 이를 지켜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관리 소홀의 책임은 사업자에게 있는데 실제 피해는 소비자가 보는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미국에서는 이 제도에 따라 소비자가 고의성이 없다는 점만 확인되면 최대 50달러(약 5만6000원)까지만 책임을 지면 됩니다. 이마저도 사업자와 소비자 사이에 책임 소재를 따져 소비자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경우에도 도용으로 의심되는 해외 거래 알림을 받고 카드사에 구제신청을 하자 며칠 뒤 결제취소 조치를 통해 환불을 받기도 했습니다. 페이팔도 이 같은 조치를 충실히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고도화된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을 비롯한 다양한 IT·보안 솔루션 도입이 필요합니다. 소비자가 개인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에 대해 사업자가 대신 보호해주는 구조인 셈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입니다.

국내 상황은 어떨까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도 여전히 약관에 이를 명시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유출을 인지하면 소비자가 사업자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은 물론 "신고하지 않을 시 사업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을 노골적으로 적어놨습니다. 지난 7월 알려진 인터파크 개인정보 유출사태 이후 본지 보도를 비롯한 일각의 지적 이후 일부 업체는 약관에서 이를 빼는 방안을 고려 중이지만, 이마저도 금융감독원 등 관련 당국이 답변을 미루고 있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Zero-liability' 제도를 안내하는 비자 홈페이지 캡처.
'Zero-liability' 제도를 안내하는 비자 홈페이지 캡처.


다시 북미지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페이팔은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간 사기방지 △지불거절 처리 등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사기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이를 식별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1000분의 1초(ms) 단위로 모든 거래를 모니터링·분석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스터카드는 12개월 동안 보고되지 않은 2건 이상의 사고에 대해 고객이 이를 지불할 필요가 없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사들도 분명 FDS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평소보다 많은 쇼핑을 즐기다 '카드 분실 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아봤다는 경험담도 전해져오고, 단돈 1000원을 이체해도 이상거래로 의심되면 추가인증을 거치게끔 하는 조치도 마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의 책임한도를 최소화하는 내용을 약관에 명시하는 곳은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 금융사는 FDS의 탐지 기준을 30만원으로 정해두고는 29만9000원씩 수상한 이체가 반복되는 피해자가 발생했는데도 '우리는 원칙대로 대응했다'며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흔히 '소비자의 천국'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천국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회계학에서 'Liability'는 '부채'라는 의미입니다. 기업들이 소비자로부터 얻은 수익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그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도 당연히 따르는 것은 아닐까요. 국내 금융 당국과 관련 업체의 태도와 접근법은 여전히 아쉽기만 합니다.

이재운기자 j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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