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개발 같은 거대 프로젝트는 그동안 한국이 해왔던 것처럼 몇 사람이 몇 년간 희생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 2부> (14) 나라밖에서 심은 과학기술의 씨앗
'우리별' 제작 참여 우주개발 베테랑 최경일 박사
"독일 엔지니어들은 집 앞 문패에 어느 기술전문학교를 나왔는지를 적어 놓는다. 그만큼 자부심이 엄청나고, 사회적으로도 존중받는다는 것이 한국과 비교해 놀라운 점이었다.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가 저성장으로 위기를 겪고 있지만, 독일을 비롯해 엔지니어를 존중하고 과학기술 기반을 탄탄히 갖춘 나라들은 위기를 극복해가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최경일 박사는 첫 직장인 독일 유멧샛(Eumetsat)에서 일을 시작할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최 박사는 현재 유럽 최대 통신위성 서비스업체인 '유텔샛(Eutelsat)'에서 위성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유텔샛은 인텔샛(Intelsat), 인말샛(Inmarsat)과 함께 세계 3대 통신위성 사업자로 꼽힌다. 유텔샛의 모체는 1977년 출범한 유럽통신국제기구로, 2001년 민간업체로 전환해 현재 32개국 출신 연구원 1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최 박사는 이곳에서 일하는 첫 번째 한국인 엔지니어다.
최 박사는 1992년 우리나라 위성 개발 역사의 시작을 알린 '우리별 1호' 제작에 참여한 국내 위성 연구 1세대다. 당시 영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최 박사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1994년 프랑스 뚤루즈 텔레콤 파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후 20년 넘게 유럽 위성업계에서 활동해왔다. 그동안 전 세계를 돌며 10여 개 위성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우주개발 베테랑이다.
최 박사는 유럽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점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연구과제를 설정하는 데 있어 구심점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국가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몇천억, 많게는 조 단위로 투자가 필요한 프로젝트가 있다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해줘야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우주 개발만을 위한 프랑스우주국(CNES)이 있는데, 이곳에서 기술 개발과 정책 개발을 전담한다. 이와 함께 유럽에는 유럽우주국(ESA)이 이사회원국의 예산을 모아 우주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구심점을 가진 기관들이 있기 때문에 수조 원에 달하는 예산을 갖고 영속성이 있게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
최 박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우주 개발 성과들은 이런 기관들이 중심을 잡고 수십 년을 내다보며 준비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특히 프로젝트를 결정하는 과정부터 전문성과 투명성을 갖췄기 때문에 오랜 기간 안정적인 추진이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올해 라이고(LIGO)에서 중력파를 검출해 전 세계가 떠들썩했는데, 이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한 게 1995년이다. 투자를 시작해 운영에 들어간 게 2000년대 초인데, 10년 넘게 전혀 성과가 없다가 5년 동안 추가로 업그레이드하면서 결국 중력파 검출해 성공했다. 15년 넘게 성과가 없다고 질책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준 정책적 신뢰와 정책을 운용하는 사람의 전문성이 없었다면 이렇게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 유럽우주국이 지난해 발사한 '리사 패스파인더'를 예로 들었다. 리사 패스파인더는 2000년에 발사가 결정됐다. 그런데 15년이 지나서야 중력파를 검출하는 실험장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단순히 '테스트'만 하는 실험용 위성을 만들어 발사했다. 실제로 중력파를 검출할 '리사'가 구축되는 건 2034년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런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선 선정 단계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신뢰성 있고 투명한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최 박사는 지적했다.
"유럽우주국은 기획 전 모든 학교와 연구소에 공문을 뿌리고 세미나와 콘퍼런스 등을 열며 10년 가까이 의논을 한다. 이런 자리에서 과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모여 엄청난 토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 관계자들도 보고 듣고 배우면서 정책을 유지한다. 이미 이견을 달만 한 사람들이 들어와 토론을 다 마쳤기 때문에 이후에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무시해도 될 정도다. 또 정부가 바뀌더라도 몇 년 동안 얼마를 투자하겠다는 내용으로 협약을 맺어 놓는다."
그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형 발사체 개발과 달 탐사 등 우주 개발도 이런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양탄일성(원자탄과 수소탄, 인공위성)' 개발을 주창한 이후 지금까지 이를 우주개발 정책 기조로 이어오고 있다. 1948년 독립 때 우주부를 만든 인도는 이제 위성과 로켓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발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현재 인도우주연구소(ISRO)에는 2만명이 넘게 일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인력이 700명 정도인데,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왜 빨리 결과가 안 나오는지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최 박사는 전 세계에서 우주 분야에서 가장 앞서나가던 러시아도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100% 순수 기술로 로켓을 개발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형 발사체 개발 자체는 지지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실패를 몇 번이나 용인해 줄 수 있을지 우려된다. 러시아가 프로톤 로켓을 개발할 때 수백 기를 만들어 테스트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종을 개발해서 발사하면 10개 중 8개가 실패한다"며 "우주개발 같은 거대 프로젝트는 그동안 한국이 해왔던 것처럼 몇 사람이 몇 년 동안 개인 생활을 포기하고 희생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 박사는 과학기술 연구개발 결과가 민간에 활발히 이전되고,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세심한 정책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프랑스우주국 안에는 우주개발 인력이 2000여 명 있고, 에어버스와 탈레스 같은 굵직굵직한 우주 기업들이 있어 이들이 고용한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다. 이 기업들이 정부 기관에서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선 특정 비율 이상은 무조건 중소기업을 통해 개발하고 제작하도록 제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중소기업이 독자적으로 연구개발을 하거나 대기업과 경쟁해 사업을 따내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있기 때문에 많은 연구인력을 고용할 수 있다. 유럽우주국까지 확대하면 유럽 안에서는 몇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거대한 산업이 우주개발에 참여한다. 한국에도 이런 정책적 기반이 있었다면 우주 분야에 지금보다 탄탄한 산업 구조가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