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원자력법' 제정 첫발… 1978년 첫 원자력 발전소 '고리 1호기' 가동 핵연료 국산화·한국표준형원전 단독설계 완공 등 기술 자립 '숨가쁜 질주' 2009년 UAE에 첫 수출 쾌거… 깨끗하고 안전한 차세대 원전 개발 '구슬땀'
1959년 3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 노원구 공릉동) 서울 공대 4호관에서 열린 원자력연구소 개소식에서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박철재 초대 원자력연구소장, 그 오른쪽이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이다. 원자력연 제공
국내 원전 건설 사상 최초로 국내 기술진의 책임 하에 설계한 한국표준형원전(KSNP) 한울(울진) 3·4호기의 건설 현장 모습. 울진 3·4호기는 최신 제어설비를 채택하고 주요 안전계통을 개선해 노심 손상 확률을 낮추는 등 대폭적인 설계 개선으로 안전성과 신뢰성을 높였다. 원자력연 제공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 2부 > (11) 원자력 발전
우리나라 원자력 역사의 시작은 한 뼘 크기의 작은 나무상자에서 시작됐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7월, 세계 전력계의 대부로 불리던 워커 시슬러 디트로이트 에디슨 전기회사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왔다. 그가 내민 나무상자에는 우라늄과 석탄이 들어있었다.
"이만한 석탄으로는 4.5㎾의 전기를 생산하지만, 같은 양의 우라늄으로는 무려 200만 배가 넘는 1200만㎾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에너지입니다. 한국처럼 자원이 적은 나라에서는 사람의 머리에서 캐낼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해야 합니다."시슬러 회장의 얘기에 놀란 이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당시 우리나라 전력 발전 시설의 대부분이 북한에 집중돼 있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에 대한 전력 송출을 일방적으로 중단해버렸고, 이어 발발한 전쟁의 여파로 국내 전력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새로운 에너지 자원이 절실했던 이 대통령에게 시슬러 회장은 "당장 50여 명의 젊은 과학기술자를 해외에 보내 교육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원자력 문제를 전담하는 행정기구와 연구개발 기관을 설치하고 인재 양성에 힘쓰면 20년 후에는 원자력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했다.원자력이란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등 무거운 원소의 원자핵을 연쇄적으로 분열시켜 만든 에너지를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연쇄 핵융합 연쇄반응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류 역사에 첫선을 보인 원자력은 이후 1953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선언과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 등을 계기로 전기 에너지 생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 '제3의 불'을 밝혀라=당시 해외 원조로 간신히 국민들의 끼니를 해결하던 한국이 미국과 구소련, 영국 등 극소수 선진국만이 보유한 최첨단 기술인 원자력에 도전한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958년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5달러인 가난한 나라에서 국비유학생으로 뽑힌 100여 명이 원자력을 배우기 위해 인당 6000달러가 드는 유학길에 올랐다. 외화는 단 10달러를 쓸 때도 대통령 결재를 받던 시절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같은 해 원자력 연구·개발·생산·이용·관리에 대한 내용을 담은 '원자력법'을 제정하고, 1959년 대통령 직속 장관급 행정기구인 원자력원을 발족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원자력원과 함께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에는 당시 파격적인 인력 규모와 예산을 편성했다. 다른 연구소장들의 처우가 고위직 공무원 2급 수준이었을 때, 원자력연구소만이 1급 3자리, 2급 5자리를 마련해 국내외 우수 과학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다른 연구소의 1년 예산이 평균 2000만환(200만원)이었던 시절 3억환(3000만원)을 원자력연구소 예산으로 편성했다.
법과 기관이 생겼지만 정작 실험을 할 원자로가 없었다. 미국 아르곤연구소에서 원자력 국비 유학생 1호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문화교육부의 초대 원자력과장으로 임명된 윤세원 박사는 국내 첫 연구용 원자로 도입에 나섰다. 윤 박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연구용 원자로 모델을 살펴보고, 그 중 제너럴아토믹(GA)사의 '트리가 마크-투(TRIGA Mark-Ⅱ)'를 도입키로 결정했다. 윤 박사는 원자로를 건설할 부지를 물색하던 중 서울 공릉동에 있던 서울공대 부지를 선정했다. 대학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해 원자력 교육 훈련과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 미국 정부는 1956년 체결한 한·미 원자력 협정에 따라 원자로 구입비 35만달러를 무상 원조했고, 한국 정부가 38만달러를 부담해 총 73만달러에 원자로를 도입했다.
1959년 7월 14일 한국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 기공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공식에서 직접 삽을 떴다. 하지만 이 시험용 원자로가 처음으로 점화된 건 3년 뒤인 1962년으로, 이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해 하와이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열출력 100㎾의 연구로 1호기가 가동한 데 이어 1972년엔 열출력 2㎿의 2호기(트리가 마크-쓰리)가 준공됐다. 연구용 원자로 1·2호기는 1995년까지 가동되면서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과 중성자 연구, 원자력 인력 교육훈련 등에 다양하게 활용됐다. 이후 우리나라는 1995년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HANARO)' 자력 설계와 건조, 2009년 사상 첫 원자력 시스템 일괄 수출로 기록된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JRTR)' 건설 사업 수주 등의 성과를 거두며 연구용 원자로 기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원자력 기술 자립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자"=1978년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가동되면서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고리 1호기는 미국 회사인 웨스팅하우스가 설계부터 기기 제작, 설치 등 건설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 세운 '수입 완제품'이었다.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건설할 계획이던 정부는 외국에서 원전을 수입하는 데 머물 게 아니라 우리 과학기술자가 원전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기술 자립을 이루길 원했다. 하지만 당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국내 연구진은 우선 원자력발전소에 사용되는 핵연료부터 국산화에 나섰다. 1983년 가동 예정이던 월성 1호기에 우리 기술로 생산한 중수로 핵연료를 사용하는 것이 첫 번째 '원자력 기술 자립 프로젝트'였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인 과학자들이 미국 시민권까지 포기하고 돌아와 핵연료 국산화에 사활을 걸었다. 연구자들은 월성 1호기 건설을 맡은 캐나다의 핵연료 제품을 대상으로 모양을 본뜬 다음, 재료와 특성 등을 하나하나 분석해 설계하는 방법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1984년, 국내 연구진은 총 개발비 89억원으로 캐나다가 약 60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핵연료와 동등한 성능을 가진 핵연료 개발에 성공했다.
자신감을 얻은 연구진은 1983년 독일 기업과 공동설계를 통한 경수로 핵연료 개발에 나서 1988년 제1호 국산 경수로 핵연료를 완성했다. 이듬해인 1989년 고리 1호기에, 1990년 고리 2호기에 국산 경수로 핵연료가 장전돼 국내에 가동 중인 중수로와 경수로 등 모든 원전에 국산 핵연료를 공급하면서 완전한 핵연료 기술 자립을 이뤘다.
연구진의 마지막 과제는 원자력발전소를 직접 설계하고 건설하는 것이었다. 원전을 독자적으로 건설하기 위해선 원전 두뇌에 해당하는 '원자로 계통'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원자력연은 다시 한 번 해외 원자력 회사와 공동설계에 나섰다. 당시 여러 원자력 회사 중 기술 이전에 가장 적극적이던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사가 공동설계 회사로 선정됐고, 1986년 연구진 50여 명이 파견됐다. 미국으로 떠나는 출정식에서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과 연구원들은 "원자로 개발을 못하면 태평양 바닷물에 빠져 죽자"고 결의하며 '필(必) 설계기술 자립'이라고 쓰인 액자를 들고 함께 만세 삼창을 우렁차게 외쳤다.
하지만 CE는 처음 합의한 공동설계 약속과는 다르게 핵심 기술을 제외한 20% 내외의 원전 설계 업무만 우리나라 연구진에 할당하고 허드렛일을 시켰다. 당시 한국형 원전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이병령 박사가 CE사에 "핵심 기술을 포함해 50% 이상의 원전 설계를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면 전원 귀국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CE는 우리 연구진의 실력을 미심쩍어하면서도 결국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밤낮없이 공부하고 설계에 매달린 끝에 1988년 영광 3·4호기의 원자로 계통 설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우리 연구진은 마침내 '한국표준형원전'인 울진 3·4호기를 단독 설계하고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완공해 진정한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뤄냈다.
◇원전 수출 시대를 열다=한국표준형원전 개발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1992년부터 10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차세대 원자로 'APR-1400'을 개발해 2007년 착공한 신고리 3·4호기부터 도입했다. APR-1400은 한국표준형원전보다 발전용량이 40% 늘어난 1400㎿급 가압경수로로, 2009년 미국, 프랑스 등 원전 강대국들을 제치고 총 400억달러(약 47조원)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에 성공해 4기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불과 30여 년의 짧은 시간 안에 원전 기술 자립에 성공한 우리나라가 세계 원전 시장의 선도국으로 발돋움한 순간이었다.
2012년에는 원자력연이 시작부터 우리 기술로 만든 100% '메이드 인 코리아' 원자로인 '스마트(SMART)' 원자로 개발에 성공했다. 15년의 개발 끝에 IAEA의 표준설계 인허가를 받은 SMART는 증기발생기와 가압기, 원자로냉각재 펌프 등 원자로 계통을 이루는 주요 기기들을 하나의 압력용기 안에 모두 설치한 세계 최초의 일체형 원자로다. SMART의 용량은 대형 원전 1기의 10분의 1 수준인 100㎿급으로, 국가 전체 전력망의 크기가 작아 대형 원전을 짓지 못하는 나라에 새로운 전력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력 생산뿐만 아니라 해수담수화, 지역난방, 공정열 공급 등 활용분야가 다양한 것도 강점이다.
지난해 3월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SMART 파트너십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이어 9월에 'SMART 건설 전 설계(PPE) 협약'을 체결했다. PPE사업 종료 후 사우디는 2기의 SMART 건설 발주를 계획하고 있다. 이로써 SMART는 개발 중인 소형 원자로 중 최초로 상업화를 추진할 수 있게 됐으며, 중동지역은 물론 세계를 대상으로 수출을 공동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차세대 원전 개발 '구슬땀'=2011년 일본 동북부 지방을 관통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현에 있던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일어났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원자력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기는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원자력 사고로 인한 재앙을 예방하고 보다 깨끗하고 안전하게 원자력을 사용하려는 시도로 미래 원자력 시스템 개발에 나서고 있다. 현재까지 건설한 원자력 발전소가 1∼3세대 원전이라면, 그 뒤를 잇는 4세대 원전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미래 원자력 시스템 개발의 중심축은 '파이로프로세싱'과 '소듐냉각고속로(SFR)' 연계기술 개발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에 남아있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 유효한 성분을 회수해서 재사용하고, 높은 열을 내거나 반감기가 긴 원소들은 따로 분리해서 처분하는 친환경적 사용 후 핵연료 재활용 기술이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사용후핵연료의 부피를 20분의 1, 발열량은 100분의 1, 방사성 독성은 1000분의 1로 줄여 고준위 폐기물 처분장 공간을 10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을 통해 얻은 성분을 연료로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소듐냉각고속로라는 특별한 원자로가 필요하다. 원자력연은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을 공학 규모의 일관 공정으로 실증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시설인 '프라이드(PRIDE)'를 2013년 구축한 데 이어, 파이로프로세싱으로 처리된 핵연료를 연료로 사용할 소듐냉각고속로를 2028년까지 건설하기 위한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소듐냉각고속로는 사용후핵연료 재활용이라는 장점 외에도 기기가 오작동하거나 고장이 나 원자로 온도가 크게 높아지더라도 스스로 정상 온도까지 낮아지는 특성이 있다. 이 원전은 열을 전달하고 식히는 역할을 하는 냉각재로 물 대신 소듐(나트륨)을 사용하는데, 소듐은 핵연료 피복재나 원자로 구조재와 화학반응을 하지 않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수소 폭발 사고가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또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대기압(1기압)에서 운전되기 때문에 원전의 압력이 과도하게 높아져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