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과학기술 통한 성장 '노하우' 전수 잇단 요청 STEPI, 에티오피아에 과학기술 협력·인재양성 등 지원 ICT·전문인력 진출 거점 '케냐 KAIST' 건립도 추진 "자원·에너지 등 공동연구 미래 동반성장 파트너 삼아야"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아프리카연합(AU) 본부에 방문해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 정부는 AU와 '한-AU 과학기술 협력' MOU를 순방 기간 중 체결해 내년부터 공동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다. 청와대 제공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부> (9) 한국 과학기술 '검은 대륙' 사로잡다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1953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불과 63달러로, 국가 수입의 절반 이상을 해외 원조로 충당했다. 밀가루 한 포대가 아쉬운 때에 과학기술에 투자할 여력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이 고급 과학기술을 보유하는 것을 치밀하게 가로막았고,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존재하던 과학기술 인력과 시설에 심각한 손실을 겪었다. 결국 과학기술이 기댈 곳은 선진국의 기술과 경제 원조뿐이었다.
1951년 유엔(UN)의 지원 아래 기술훈련생을 처음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는 국제 과학기술 협력의 문을 열었다. 비록 일방적으로 무상 원조를 받는 처지였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나라보다 뜨거웠다. 당시 수많은 후진 개발도상국들이 원조를 받았지만, 한국처럼 실제 경제 성장에 성공한 나라는 흔치 않았다. 1955년부터 7년간 1000만달러를 투입해 한국인 공·농·의학도를 미국에서 공부시킨 '미네소타 프로그램'은 2차 대전 후 개도국 교육 원조 사업 중 최대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6년 월남전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1000만달러를 원조받아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반도체, 전자, 통신, 중화학공업, 철강 등 국내 주력 산업 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의 토대를 마련해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역시 1971년 미국 국제개발처(USAID)로부터 600만달러의 교육 차관을 받아 설립돼 국내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까지 선진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기술을 받기만 했던 한국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국, 일본, 독일 등과 국가 간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며 대등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6년 처음으로 기술수출을 하게 된 우리나라는 1980년대 다양한 국제 공동 과학기술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후발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술 공여 사업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전 세계적으로 기술보호주의가 강해진 1990년대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확대했으며, 유럽연합(EU),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등 지역 협력기구의 각종 협력 프로그램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최근 국제 사회의 원조를 받는 개도국들은 다른 선진국보다도 한국을 과학기술협력 파트너로 원하고 있다. 똑같이 못살던 나라가 불과 50년 만에 과학기술을 통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최근 KIST가 베트남에 'V-KIST'를, KAIST가 케냐에 '케냐 KAIST' 설립을 추진하는 등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 성장 경험을 개도국에 전수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 과학기술 미래 맡긴 에티오피아=1951년 한국전쟁에 6000여명의 병사를 파병한 에티오피아는 당시만 해도 1인당 GDP가 187달러로 31달러에 불과했던 한국보단 그나마 사정이 나은 나라였다. 하지만 한국의 1인당 GDP가 2만5990달러에 달하는 현재,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는 739달러로 세계 최빈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뒤 독재와 공포 정치를 이어온 멩기스투를 몰아내고 1991년 집권한 멜레스 제나위 총리는 한국을 경제 성장을 위한 '롤모델'로 생각했다. 에티오피아 근대화를 이끈 제나위 총리는 1998년과 2010년, 2011년 세 차례나 직접 한국을 찾았고, 박정희 전 대통령 전기를 8차례나 읽을 정도로 한국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에티오피아 현 총리는 2012년 사망한 제나위 총리의 뒤를 이어 한국식 발전모델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에티오피아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을 하일레마리암 총리가 직접 공항까지 나와 맞이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특히 에티오피아 정부는 한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다. 아직도 38억달러 규모의 해외 원조를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는 1960년대 한국이 해외 원조를 활용해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고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2011년 한국과 과학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한 에티오피아는 현재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과 '과학기술 로드맵 자문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2012년 과학기술 분야의 국가 차원의 이슈와 방향성을 제시한 '과학기술혁신정책(STI Policy 2012)'을 수립하고 이를 이행하는 단계로 기술로드맵을 준비 중이다. STEPI는 국제개발을 위한 과학기술정책 사업을 전담하는 '국제기술혁신협력센터(IICC)'를 통해 에티오피아의 기술로드맵 자문과 함께 이공계 분야의 선도대학으로 성장하는 과학기술대학교 발전방향, 에티오피아 정부가 전략적으로 접근 중인 설탕 산업의 자동화 시스템 교육훈련 등 기술협력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 정부는 한국 과학자와 함께 앞으로 10년 후를 내다보고 젊은 과학기술 인재 키우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해외 원조기관의 자금으로 한국 전문가들을 데려와 아다마대학과 아디스아바바공과대학 등 과학기술부 산하 과학기술특성화 대학의 주요 보직자로 임명하고 있다. 최영락 전 STEPI 원장이 에티오피아 과학기술부 정책자문관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2011년 이장규 전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가 아마다대학 총장에 임명되는 등 8명의 한국 과학자들이 과기특성화 대학의 주요 교수진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이인 KAIST 명예교수가 공학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특수대학인 아디스아바바 과학기술원 원장에 임명돼 오는 8월부터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STEPI는 에티오피아 교육부와 2020년까지 30여 명의 교수를 에티오피아 대학으로 파견하는 '에티오피아 대학 공학교육 역량 강화를 위한 한국인 과학기술자 초빙사업' 계약을 맺었다. 에티오피아 대학은 그동안 독일 학술교류처(DAAD)를 통해 인력을 고용해 왔지만, 한국식 과학기술 모델을 배우기 위해 DAAD와 계약을 해지하고 STEPI로 대체해 한국 과학자들을 영입하기로 했다. 에티오피아 측은 직접 경제 성장 시대를 겪어 온 한국인 과학자들이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에게 살아있는 경험을 전수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박 대통령 순방을 계기로 에티오피아와 공동 연구개발도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아다마대와, 한국천문연구원은 엔토토천문대 및 연구센터와 우주·천문 협력에 나서기로 했다. 에티오피아는 2020년 독자위성 발사라는 도전적 목표가 있으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번 협력을 통해 에티오피아는 관련 인재를 육성할 수 있고, 한국은 천문 관측을 위한 아프리카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한국화학연구원은 아다마대와 소외질병 연구개발 협력 MOU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아디스아바바공대와 식량과 마시는 물 확보를 위한 적정기술 연구협력 MOU를 체결했다. 말라리아 등 소외질병 퇴치와 마시는 물 확보는 아프리카의 생존과 직결된 시급한 문제로, 우리 기술이 지구촌 난제 해결을 돕는 사례가 될 전망이다.
조황희 STEPI IICC 센터장은 "지금 한국의 과학기술이 개도국에서 절정의 관심을 받고 있는 시기"라며 "이들은 일회성 지원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국가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과학기술 협력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를 동반성장을 위한 파트너로 만들자=이번 순방에서 에티오피아에 이어 우간다와 케냐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이들 국가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ICT) 분야에서 다양한 협력을 약속했다. 두 나라는 모두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과학기술 육성을 통해 제조업 중심으로 전환하는 국가발전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미 성공한 경험을 가진 한국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의 일환으로 현지에 ICT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우리 ICT 기술과 기업이 진출하는 거점으로 활용하는 협력을 진행할 계획이다. KAIST와 광주과기원(GIST) 등 국내 과기 특성화 대학들은 현지 우수 대학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연구협력에 나선다. GIST는 두 나라 최고의 대학인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과 케냐 나이로비 대학과 MOU를 각각 체결하고, 현지 우수 인재를 발굴해 양성하기 위한 연구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 케냐는 우리나라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자금을 활용해 '케냐 KAIST' 건립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KAIST는 지난해 사업 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데 이어 본 사업을 추진하면서 케냐 측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방침이다.
아프리카와 과학기술 협력은 단순한 원조 차원이 아닌 미래에 동반 성장하기 위한 파트너로 발전하는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은 이 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전문기술과 인력 등 기반 조성을 통해 현지 국가의 자생적 발전을 돕는 '지속 가능한 개발협력 모델'을 추진해 국가 간 우호적 관계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한국은 에티오피아 사례와 같이 은퇴 과학자 등 국내 고경력 전문인원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현지의 풍부한 생물자원과 에너지 등을 공동으로 연구해 두 나라의 과학과 산업계가 동반 성장할 기회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 센터장은 "개도국들이 스스로 성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산업 인프라의 부족뿐만 아니라 불안한 정치 상황 등 다양한 내부 문제로 인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단순히 기술을 이전하는 것만으로는 인프라가 부족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 해당 국가를 속속들이 아는 전문가들이 인력, 교육, 금융 등 기술이 작동하기 위한 여러 요소를 패키지로 컨설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이미 빠른 의사결정과 신속한 자금 제공으로 개도국과 협력을 빠르게 넓혀나가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아프리카와 남미에 현지 공무원과 기업인 등을 대상으로 한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을 설립하고 10년 뒤 중요한 의사결정자 500명을 육성한다면 '기회의 땅'에 진출하기 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진국도 주목하는 '창조경제'=해방 이후부터 1976년 한·미 과학기술협력협정이 체결되기 이전까지의 협력은 한국의 과학기술기반 구축에 필요한 기술인력 양성, 연구소 설립 지원 등 미국을 비롯한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의 개발원조 형태로 이뤄졌다. 이후 1980년대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따라 일방적인 무상 개발원조는 중단되고,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에 따른 상호협력 관계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선진국들과 경제 성장을 위한 동반자 관계로 협력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목표인 '과학기술·ICT 융합을 통한 창조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국제 무대로 과학기술의 영역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며 2014년 '과학기술·ICT 기반 국제협력 종합계획'을 확정했다.
최근 박 대통령의 프랑스 순방에서는 창조경제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프렌치테크'로 대표되는 스타트업 중심의 혁신 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프랑스는 한국과 창조경제 관련 전략과 정책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와 프랑스 그르노블 지역의 창업 지원 역할을 담당하는 '디지털 그르노블'은 헬스케어, 에너지, 전자상거래, 사물인터넷, 디지털전환 등 5개 분야를 중심으로 두 나라 간 스타트업을 교류하기로 합의했으며, KAIST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과학기술 고등교육기관인 '에꼴폴리텍'과 협력 약정을 통해 창업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공동연구센터를 설치하는 등 혁신 협력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또 KIST는 그르노블 알프스 대학과 프랑스 원자력청(CEA) 산하 전자정보기술연구소인 '레티(Leti)'와의 MOU를 체결하고 인력교류와 공동연구 등의 협력 활동을 추진한다.
조 센터장은 "최근 대부분 경제·사회적 이슈들이 과학기술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 간 과학기술 협력은 단순히 기술을 교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외교 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다"며 "그동안 한국은 주로 대북 관계를 고려한 국방과 경제 협력을 위주로 외교 활동을 펼쳐왔지만, 앞으로는 과학기술을 통한 장기적 협력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