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적자·외채증가·고물가 '삼중고' R&D로 위기 극복 나서 기술진흥확대회의·특정연구개발사업 등 산·학·연 역량 결집 R&D 투자 1981년 2931억서 1991년 4조1584억 폭발적 증가 에너지·정보통신·컴퓨터·생명산업 등 첨단 산업분야 급부상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64K D램 반도체의 모습. 1983년 12월 1일 삼성전자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전자 제공
1986년 가입자 1만 회선, 중계선 2000 회선 용량 규모의 전전자 교환기 'TDX-1'이 개통돼 국내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에 이어 세계 10번째 디지털 전자교환기 자체 개발 및 생산국이 됐고, 막대한 수입 대체 효과와 물론 정보통신(ICT) 기술력 향상을 가져왔다. 당시 ETRI 연구진이 교환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ETRI 제공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부> (5) 첨단기술 개발 가속화한 1980년대 과학기술
1970년대 '중화학 공업화'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수출액 100억달러를 이룬 한국은 1980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과잉·중복투자로 인해 몇몇 대기업의 독과점 구조가 형성됐고, 조립 위주의 산업은 수출이 늘어나면서 수입도 늘어나는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더해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선진국들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수출길이 좁아졌고, 국내 임금이 상승하는 사이 낮은 임금을 앞세우며 추격해오는 후발 개도국과의 경쟁이 격화됐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무역적자, 외채증가, 고물가의 '삼중고'에 시달리게 됐다.
이에 정부는 자력으로 핵심 전략기술을 개발하는 '기술 드라이브(기술 우위)' 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1980년대 초 세계적으로 첨단 기술 개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기술이 국가 경쟁력의 결정적 요인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진국 간의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술보호주의'가 강화돼 우리나라는 선진 기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저임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외국기술을 모방해 수출하던 방식이 한계에 직면하자 자력으로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국가 과제로 부상했다.◇'기술 드라이브' 추진 대통령 주재 '기술진흥확대회의' 신설=1980년대 과학기술 정책은 '기술 드라이브'와 '기술진흥확대회의'로 대표된다. '기술 드라이브'라는 용어는 1981년 10월 과학기술처가 발표한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 과학기술 부문 실천계획'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제5공화국 정부는 1970년대에 대해 "저임 노동력, 외국 자본, 단순 모방의 외국 기술을 토대로 하여 경제의 양적 성장을 이룩했지만, 기술의 발전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전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대체할 '기술 드라이브'를 앞세워 창의와 혁신에 기반을 둔 기술·두뇌 집약 산업의 단계로 도약해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술 드라이브 정책은 1970년대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인 1980년대의 '제2의 경제 도약'을 위한 제5공화국의 정책 기조로, 단순한 과학기술 정책이라기보다는 경제 정책이자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이었다.
기술 드라이브 의제를 실질적 정책으로 이끈 핵심 정책기구가 바로 기술진흥확대회의였다. 1982년 1월 처음 열린 제1회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정부는 기술 드라이브를 과학기술 정책의 공식 기조로 선포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앞으로 정부의 모든 경제 사회 발전 계획이나 산업 정책 추진에서 기술 및 인력 개발에 중점을 두는 기술 우위 정책을 확고한 신념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관계 부처의 역할까지 세세하게 지시하며 정책 추진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후 기술 드라이브 정책은 전두환 정부의 모든 경제 및 산업 정책 추진에 있어 함께 고려해야 할 중요한 지위를 누렸다.
기술진흥확대회의는 높아진 과학기술의 정치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에는 국무위원과 여야 정치인, 경제계, 학계, 연구계 등을 대표하는 인사 250명 내외가 참석했다. 기술진흥확대회의는 법적인 근거가 있지 않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총 12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27개 정책 과제를 다뤘다. 회의에서는 관계 부처 및 기관이 해외 첨단기술 동향과 기술개발 사례 등을 보고하고, 기술개발 대책과 기술인력 육성, 생산성 향상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실제 제도와 정책에 반영돼 성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연구개발비는 연간 30% 내외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으며, 특히 민간의 비중이 1980년 36.1%에서 1988년 78.7%로 증가해 정부와 민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역전됐다. 여기에는 국가 연구개발 사업인 특정연구개발사업 추진을 비롯해 각종 기술진흥기금 마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간 연구소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1981년 53개에 불과하던 기업 부설 연구소는 1988년 604개가 됐다. 민간 연구소 증가는 연구요원에 대한 병역특례와 연구용 견본에 대한 특별 소비세 면제, 연구소 건물 및 토지에 대한 지방세 면제, 연구개발 용품에 대한 관세 경감 등 일련의 제도 정비가 영향을 미쳤다.
◇'특정연구개발사업'으로 산·학·연 역량 결집=1982년 정부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별로 지원하던 연구개발 자원을 통합해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특정연구 개발사업'을 출범했다. 정부가 직접 전략적 차원에서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고 핵심 산업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추진한 최초의 국가R&D 사업이었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은 '국가주도 연구개발'과 '기업주도 기술개발'의 두 개 사업으로 시작됐다. 전자는 미래첨단기술, 공공기술 등 성공의 불확실성과 투자위험도가 높고 공익성이 큰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정부가 연구비를 전액 부담하는 사업이었다. 후자는 민간 능력에만 맡기기에 적합하지 않은 산업핵심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정부·민간 공동으로 연구개발비를 부담하는 사업이었다. 이후 1983년에는 대학의 연구잠재력을 활용하기 위한 '목적기초연구개발사업'이 신설됐으며, 1984년에는 연구개발성과의 기업화를 목적으로 한 '신기술기업화사업'이 시작됐다. 이어 1980년대 후반까지 공업기반기술 개발사업, 대체에너지기술 개발사업, 기초연구지원사업 등이 출범했다.
1982년에는 반도체 및 컴퓨터기술, 정밀화학공업기술, 기계공업고도화기술, 에너지 및 지원이용기술, 시스템 산업기술, 기타 핵심산업기술 등 6개 분야를 중점개발 대상으로 선정해 추진하다가 1983∼1984년에는 생물, 소재공업, 섬유 · 고분자, 건설 · 환경 · 플랜트 엔지니어링 기술 등을 독립·확장해 9개 분야로 추진했다. 1985년에는 측정표준기술과 우주개발 기술분야를 추가하고 종전의 에너지 및 자원이용기술을 자원활용기술, 에너지절약기술, 원자력이용기술, 해양개발기술 등으로 세분화해 총 15개 분야를 중점대상으로 추진했다. 1986년부터는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 장기계획 수립을 계기로 정보산업기술, 재료 기술, 산업요소기술, 에너지자원기술, 공공복지 및 대형복합기술 등 6개 기술계열로 묶어 전략기술별 개발목표를 명확히 했다.
특정연구 개발사업은 기업과 연구기관, 대학이 협력하는 대규모 연구 사업의 틀을 마련하고, 과학기술처뿐만 아니라 타 부처의 R&D 사업을 태동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출연연 통폐합 '진통'=1980년 정부는 연구개발체제의 핵심인 정부출연기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기관을 통합·조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국내 연구인력과 시설, 투자규모에 비해 연구기관 수가 너무 많고, 연구직에 비해 관리직이 많아 연구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또 비슷한 연구기간 간의 중복연구가 많고, 기관 간의 협조나 국가 차원의 조정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1980년 11월 과학기술처는 '연구개발체제정비와 운영개선안'을 발표하고 16개 출연연을 8개의 대단위 연구소로 통합·조정했다. 동시에 과학기술처는 출연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중장기 연구개발계획의 발전과 연구업무의 전산화, 중복행정지원 업무의 통합 운영, 연구과제 중심의 신축성 있는 조직운영, 연구원의 처우 개선 및 연구 분위기 조성 등을 추진했다.
정부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을 통해 출연연과 기업의 공동연구로 첨단산업이 뿌리를 내리도록 계획했다. 정부는 출연연이 특정개발사업에서 오랫동안 연구가 필요한 큰 기초연구개발사업과 정부가 주도해 나가야 할 공공복지기술을 개발하도록 했다. 또 시장 경쟁이 아닌 보호 속에서 키워야 할 첨단산업의 중장기 대형과제를 기업과 공동으로 개발토록 했다.
하지만 연구기관의 전면적인 통폐합은 일반 행정기구와는 달리 많은 시간을 두고 그 타당성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정부의 통합조치로 인재양성과 연구개발을 함께 수행할 목적으로 연구개발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고급 과학기술 인재 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KAIS)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통합했으나, 각자 역할과 목표가 달라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여러 부작용을 드러냈다. 결국, 통합 KAIST는 8년 만인 198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다시 분리돼 각각 독립기관으로 재출발하게 됐다.
◇D램 반도체, TDX 등 대형 성과 거둬=1980년대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의 저변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국내 R&D 투자는 1981년 2931억원에서 1991년 4조1584억원으로 늘었으며, R&D 투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0.59%에서 1.74%까지 늘었다. 특히 이 기간에 기업의 R&D 투자는 1207억원에서 2조9656억원까지 증가해 정부 R&D 투자를 넘어서는 성장을 기록한다. 전체 연구원 수 역시 1980년 1만8434명에서 1985년 4만1473명, 1990년 7만503명으로 빠르게 늘어났다.
비록 선진국보다 R&D 투자의 절대적 규모와 상대적 비중 모두 크게 뒤떨어졌고 핵심·첨단기술 수준 역시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한국 경제는 첨단기술 제품 개발에 연이어 성공하며 경제 성장을 이어갔다.
1980년대 기술혁신은 D램 메모리 반도체 개발과 전전자교환기(TDX-1) 상용화, 광통신용 광섬유 기술 개발 등 정보통신(ICT) 분야와 B형 간염백신, 한탄바이러스 백신 개발 등 생명공학(BT) 분야, 고강도 아라미드 섬유, 고밀도 폴리에틸렌 생산기술 개발 등 신소재 분야 등 다양한 첨단 기술 분야에 걸쳐 이뤄졌다. 이를 통해 1970년대 태동한 철강, 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화학 섬유 등 기존 산업뿐만 아니라 에너지, 정보통신, 컴퓨터, 생명산업 등 새로운 첨단 산업 분야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외 보유기술과 자원을 총동원한 범국가적 국책프로젝트로 개발된 D램 반도체와 TDX-1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국내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TDX-1 개발은 핵심 통신장비를 우리 기술로 만들었다는 자신감과 함께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거듭나는 초석이 됐다. 교환기 부품 기술과 소프트웨어 설계 기술, 품질 보증 체계 등을 국내 기업이 확보하고, 전국 모든 통신 시설을 우리 손으로 유지·운용·보수 할 수 있게 된 효과까지 고려하면 그 파급 효과는 경제적 이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 TDX 개발을 통해 쌓은 산·학·연·관 협동 개발 노하우는 이후 CDMA, 반도체, 주전산기 개발 등 대형 국책연구개발의 모범사례가 됐다.
반도체의 경우 1983년 64K D램 개발을 시작으로 1986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중심으로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서울대 부설 반도체공동연구소 등이 참여한 산·학·연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1989년 4M D램 양산 시제품을 개발, 당시 반도체 분야 세계 최강국이던 일본과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삼성은 1992년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일본 업체들을 꺾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반도체 수출은 1980년 4억3400만달러에서 1990년 45억4100만달러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단일품목으로 수출 100억달러를 처음 돌파한 것도 1994년 반도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우리 기술진이 개발한 종합정보망 'WINS(Wide Information Network Service)'를 통해 각종 정보를 처리했다. WINS는 이후 국내에 종합정보통신망(ISDN)을 구축하는 기반이 됐으며, 올림픽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휴대폰 'SH-100'이 선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