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해운동맹 새판짜기 분주 중국·프랑스 중심 '오션' 결집 국적 선사는 해외시장서 소외 한진해운·현대상선 구조조정 합병·퇴출 등 시나리오 거론 거친압박에 입지약화 우려도
25일 한진해운이 운영하는 부산항 신항터미널에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다. 이날 해운동맹 재편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정부가 해운사 지원책을 밝혀야 해운동맹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급물살 타는 기업 구조조정
[디지털타임스 양지윤 기자] 해운업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가운데 세계 해운동맹 재편을 지렛대 삼아 산업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해운업 구조조정은 국적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왔다. 각 회사가 속한 해운동맹 체제가 달라 구조조정의 실익이 없다는 명분론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세계 해운동맹의 새판짜기가 진행되면서 양대 국적선사의 합병이나 퇴출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해운업 구조조정의 방침이 한계기업 퇴출에 초점이 맞춰져 산업경쟁력 강화라는 본래 목적이 등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개별 기업의 재무건전성뿐만 아니라 선복량(선박 적재량)과 운송 네트워크, 선대 구성, 향후 투자 계획들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진해운은 25일 오후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에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을 신청했다. 해양수산부도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김영석 장관 주재로 최근 세계 해운시장 재편과 관련한 점검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해운물류 업·단체와 항만공사,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등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지난해 11월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범정부협의체를 구성하고 산업별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 방향을 논의한 지 5개월 만이다.
문제는 범정부협의체 출범 이후 일련의 과정이 산업경쟁력 제고에 방점이 찍히기보다 개별기업이 자구안을 마련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이다. 자산매각을 통한 유동성 위기 완화와 선박 임차료인 용선료 재협상 등의 자구안 마련과 이행에 집중한 것이다. 같은 시기 세계 해운업계는 새판짜기에 분주했다.
중국원양운수그룹(COSCO)과 중국해운그룹(CSCL)이 합병해 중국원양해운(CCSG)이 출범했고, 세계 3대 해운사인 프랑스의 CMA CGM은 싱가포르 선사 APL을 인수해 덩치를 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CCSG이 CMA CGM과 손을 잡고 홍콩의 OOCL, 대만의 에버그린라인 등과 새로운 해운동맹 '오션'을 설립하기로 하면서 국내 해운업계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에 빠졌다. 안방에서는 구조조정과 퇴출 압박이 가해지고, 해외시장에서는 동맹 재편과정에서 소외되며 갈림길에 서게 됐다.
전문가들은 국내 해운업이 안팎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정부가 정치 논리에 휩쓸려 구조조정에 대한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을 정하지 않은 채 임기응변으로 대응해 온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해부터 중국과 프랑스 선사를 중심으로 인수합병 등 시장 재편이 이뤄진 만큼 해운동맹 새판 짜기는 예측불허의 상황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정부가 국내 해운사에 자구안 마련이나 이행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퇴출 등의 단어를 써가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 행태도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구조조정 독려 차원에서 인수합병과 법정관리 등을 언급하는 것은 해당 선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이는 해운동맹 내에서 입지 약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해운업계의 전문가는 "정부가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을 4·13 총선거 이후로 미뤘다가 최근 속도를 내기 위해 보여주기 식으로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다"면서 "해운업 구조조정에 대한 밑그림이 있었다면 해운동맹 재편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이런 행태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계기업을 퇴출하는 데만 골몰하지 말고, 해외 선사들이 국내 업체를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무건전성을 강조하는 금융권의 시각이 지배적인 것에도 경계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국내 수출입 화물의 99.7%를 선박으로 운송하는 만큼 해운업뿐만 아니라 전체 산업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관계자는 "사업 경쟁력에선 한진해운이 우위에 있지만, 재무 여건이나 용선료 협상 등을 놓고 보면 현대상선이 상대적으로 나은 부분이 있다"면서 "선복량과 운송네트워크, 선대 구성과 향후 세계 시장 내에서의 경쟁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