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업구조조정 업종 이해 부족
현대제철 동부제철 인수 등 무산 대표적
눈앞 부작용 우려 금융권 수수방관도 문제
경영권 방어→기업부실 악순환
기업 자체 자정 노력 필요




■ reDesign 대한민국 16대 어젠다
'좀비기업' 제대로 정리해야


[디지털타임스 양지윤 기자] "지난 20년 간 국내시장의 구조조정이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이제 해외로 성장의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 1월 아시아 진출 20주년을 맞은 맥쿼리증권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아시아에서의 20년' 보고서에서 2026년 이후 일본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예측했다. '잃어버린 20년'과 고령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일본을 '지는 해'가 아닌 '떠오르는 해'로 지목한 것이다.

맥쿼리증권이 일본의 미래를 밝게 보는 까닭은 뜻밖의 단어에 숨어 있었다. 바로 구조조정이다. 맥쿼리증권은 "일본은 과거 20년간 동종 업계의 경쟁자간 합종연횡이 진행됐으며 주로 금융계, 은행, 보험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면서 "또한 선택과 집중전략으로 가전처럼 성과가 낮은 비즈니스는 정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이후 다음 20년은 국내 시장 안정화와 글로벌 역동성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하지만 20년 뒤 한국의 미래를 밝게 보는 전문가 집단은 그리 많지 않다. 구조조정을 바라보는 시각도 부정적이긴 마찬가지다. 정부와 민간이 한목소리로 "지금이 기업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구조조정 업종에 대한 정부의 '무지' = 현재 진행 중인 구조조정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무엇보다 정부의 능력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구조조정 업종에 대한 전문성과 이해도가 결여한 상태에서 물리적 결합에만 치중했다는 게 전문가들과 업계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현대제철의 동부제철 인수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 △한화종합화학·롯데케미칼·태광산업·삼남석유화학 등 PTA(고순도 테레프탈산) 업체 간 합병 등 지난해 관계 부처 차원의 구상 혹은 민·관 합동으로 논의했다가 무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대제철의 경우 산업부가 지난해 철근·H형강 등 비자동차용 부문은 장기적으로 구조조정 하고, 동부제철의 인천·당진 공장을 인수해 전기로 사업을 대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문제는 철근과 H형강이 전기로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라는 점이다. 산업부의 구상대로라면 시장에 나온 매물을 인수해 기존 사업을 유지하라는 얘기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현대제철에 전기로 사업 철수를 종용하면서 동부제철 공장 인수를 제안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가장 기본적인 상황도 파악하지 않은 채 구조조정을 추진했다가 망신을 자처한 꼴"이라고 꼬집었다. 이후 산업부는 철강산업은 합금철 분야에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정부의 무지는 PTA 분야에 대한 구조조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내 기업이 PTA를 주로 수출하는 중국은 공격적인 신증설을 통해 2013년 이후부터 자급률이 90% 후반대에 이를 정도로 공급이 포화상태다. 더욱이 단일 기업의 생산설비를 놓고 보면 중국 업체가 국내 업체보다 최소 2~3배 이상 크기 때문에 규모 면에서 한참 뒤진다. 국내 4사의 합병안은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 통합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관련 업계와 전문가들의 평가다. 생산공장이 울산과 대산, 여수에 뿔뿔이 흩어져 생산시설을 통합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어서다. 석화 업계 관계자는 "PTA 구조조정이 답보상태에 놓인 것은 해당 기업의 소극적 태도도 문제지만 정부가 구조조정에 대한 철학과 원칙, 업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게 결정적이었다"고 진단했다. 다른 관계자는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할 때 산업계의 의견을 청취했더라면 관계 부처의 구상이 뒤집히는 상황이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씁쓸해 했다.

◇금융권의 수수방관=구조조정에 미온적인 금융권의 태도도 구조조정이 더디게 전개되는 요인이다. 채권은행 입장에선 선제 구조조정에 나설 경우 실익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 충당금을 추가로 설정하면 비용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경영평가에서 불이익도 뒤따른다. 구조조정에 나설 명분도 실익도 없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채권은행은 기업에 대한 신용위험을 평가할 때 현재와 미래의 재무 여건보다 앞으로 경기회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느슨하게 기업을 관리하게 되고, 좀비기업은 퇴출 당하지 않은 채 연명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금융권이 주도한 워크아웃 가운데 성공작이 없다는 점도 은행권이 구조조정에 소극적인 요인으로 지목받는다. 출자전환과 신규자금 지원을 통해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정상화하고, 주식 가치가 뛰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하는데 최근 이 같은 사례가 드물다는 게 금융권의 설명이다. 국책은행의 한 관계자는 "구조조정 기업의 가치가 높아져서 향후 지분 매각을 통한 차익 실현이 크다면 채권은행 입장에서도 눈앞의 손해를 감내할 것"이라며 "채권은행들이 동부제철에 대해 추가 출자전환에 선뜻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워크아웃을 추진하는 경우 시장성 차입 비중이 높아 채권은행의 역할이 제한적인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이명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의 경우 시장성 차입 증대로 채권단 협약에서 제외되는 채무비중이 커짐에 따라 채권은행 중심의 구조조정에 어려움 발생하고 있다"며 "채권은행 중심의 워크아웃을 추진하더라도 채권은행 간 이견 발생으로 워크아웃이 지연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금융감독원이 워크아웃 추진에 조정자 역할을 했지만 관련 법이 미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의 안이한 태도=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안이하게 여기는 태도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오너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부실이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 했다가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치는 사례가 심심찮다. 하준 산업연구원 산업경제연구실 부연구위원은 "지속해서 기업가치가 하락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부실이 심화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구조조정 절차에 참여하는 것이 사회적 관점에서도 효율적이지만 경영권 박탈을 꺼려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웅진그룹과 STX, 동양그룹을 포함해 최근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동부그룹과 현대그룹 등이 그 예"라고 설명했다.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진행하는 계열사 간 지분변동과 합병·분할 등도 사업재편이나 경쟁력 제고보다 경영권 승계에 초점이 맞춰져 문제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금융 자회사 GE캐피탈과 가전부문 매각, 듀폰과 다우케미칼의 주요 사업부 매각 등이 모범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흑자를 내고 있거나 오랜 기간에 걸쳐 회사의 상징이 된 부품·제품까지 과감히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 부연구위원은 "국내 기업들은 사업재편이 신성장동력을 구축을 위한 것인지 재벌 3·4세들의 영역 나누기가 목적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면서 "전체 국민경제 차원의 충격 최소화를 고려하는 시장규율과 정책 조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양지윤기자 galileo@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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