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설사끼리 무리한 경쟁을 하지 말고 협력해서 공동 수주전략을 펴달라, 정부는 금융지원을 잘 하겠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오갔습니다."
시진핑 주석이 '일대일로' 기치를 내걸고 중국 기업의 중동 진출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이란 등을 방문해 대형 사업 계약을 맺은 직후인 지난달 27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이란 진출 전략 세미나'에 참석한 한 인사는 이같이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행사는 국토교통부와 해외건설협회가 주최하고 대형 건설사 관계자 등이 참석해 경제 제재가 풀린 이란에 진출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중국, 급부상하는 이란 시장에서도 확실한 우위 차지=한 건설사 관계자는 "과거 이란에 진출해 사업을 할 때만 해도 현지 고위 관계자가 우리의 시공 품질을 극찬하고 후속 사업을 요청할 정도였는데 우리가 경제제재에 참여하면서 네트워킹이 끊긴 반면 중국은 계속 사업을 벌여 과연 지금 들어가도 기회가 있을 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란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기세가 무섭다. 중국국가기계공업그룹과 쑤뎬그룹은 이란 현지 건설사(MAPNA)와 공동으로 이란 수도 테헤란과 종교 성지 마슈하드를 잇는 926㎞의 고속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 이달 14일 이란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착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했다. 3년6개월간 총 21억달러가 들어가는 초대형 공사로, 공사비의 85%는 중국이 융자로 제공한다. 이와 별도로 지난 1월 이란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국영 중국철도국제그룹이 참여하기로 한 총 길이 375㎞의 테헤란~이스파한 고속철도 건설 사업 등 17건의 각종 사업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시 주석은 사우디에서도 공격적인 외교전략을 펴 신재생에너지, 원자력발전소 건설 협력에 합의했고, 중국 국영석유회사 시노켐이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와 15억달러 규모의 석유화학공장을 사우디에 세우기로 했다.
◇가격경쟁력 높은 데다 기술격차도 없어져=1월에 이집트에서만 100억달러를 수주한 중국 건설업계가 이들 프로젝트 계약까지 맺으면 중동 시장 대형 사업을 거의 싹쓸이하는 결과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제유가 급락으로 재정위기를 겪는 중동 국가들을 대상으로 중국은 차관은 물론 건설사들과 협력해 유리한 조건의 금융조달(프로젝트 파이낸싱)까지 해주고 있어 국내 기업들과 비교가 안 되는 경쟁우위에 있다.
한 건설사 해외영업 관계자는 "중국의 수주 텃밭인 아프리카 시장을 보면 중국 기업들이 국영은행과 손잡고 거의 제로금리 수준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어 경쟁이 되질 않는다"며 "중동 시장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은 자금조달 능력뿐만 아니라 시공·가격 경쟁력에서도 우리를 앞서고 있다. 건설산업연구원이 2015년 기준 글로벌 건설산업 경쟁력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는 건설산업 경쟁력 종합평가(미국 100점 기준)에서 73.8점으로 중국(80.1점)에 뒤졌다. 시공 경쟁력과 가격 경쟁력에서 각각 7.0점, 8.5점을 받아 중국의 10점, 9.7점에 확연하게 밀렸다. 그동안 중국에 앞섰던 설계경쟁력마저 2.3점으로 같아졌다. 가격 경쟁력에서 확실히 밀리는 데다 격차가 있던 기술 경쟁력마저 중국에 추월당한 상황에서 수주절벽은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지역 다변화·SW역량 강화로 극복해야=이 가운데 국내 기업들이 활로를 찾으려면 도급 중심의 사업에서 벗어나 투자, 개발, 유지관리, 운영 등 종합적인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프로젝트 관리, 금융, 사업기획 등 소프트웨어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동지역을 벗어나 지역과 진출분야 다변화도 필수적이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해외 기업과의 제휴와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 역시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맞춰 지원정책 방향을 재점검하고 맞춤형 금융지원 등 보다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지원책을 내놔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민형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제 해외 건설은 자금력 확보가 관건"이라며 "그동안 민간 금융기관이 예금대출 마진을 위주로 영업했다면 앞으로는 건설사의 해외 프로젝트를 담보로 자금조달에 참여하는 등 투자금융(IB)을 검토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오경일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중동팀장은 "중국이 확연한 우위를 보이고 있는 이란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사업을 수주하려면 기술력을 확보한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자금조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