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 생활과학부 기자
이준기 생활과학부 기자

이번에도 투서였다. 지난 24일 저세상으로 떠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정모 박사의 얘기다.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투서로 인해 사라졌다. '남의 잘못을 어떤 기관이나 대상에게 몰래 알리는 행위나 글'이라고 정의하는 투서의 무서움은 이렇게 크다. 특히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익명의 투서는 경쟁사회인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이자 어두운 자화상이다.

유독 과학기술 분야는 투서가 난무한다. 과거 청와대 인사수석실에 근무했던 모 인사는 "분야별로 청와대에 접수된 투서를 보면 과학기술 분야가 가장 많아 놀랐다.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묵묵히 연구만 하는 줄 알았던 과학자들의 투서가 대단하더라"라며 혀를 찼다.

정 박사는 소위 '잘 나가는 과학자'였다. 바이오융합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며 기술이전도 많이 하고,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연구소기업 설립으로 이어져 대규모 해외수출도 이루는 등 연구뿐 아니라 기술사업화에서도 역량을 인정받았다. 자신이 이끄는 사업단을 연간 10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독립 연구단'으로 키울 정도로 탁월한 경영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한순간 연구 인센티브를 유용한 사람으로 내몰려 죄인 취급을 받으며 감사원 감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감사를 통해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수개월에 걸친 감사로 인해 심신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상했다. 그러다 얼마 안 돼 또다시 투서가 접수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는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자신을 몰아가 급기야 세상과 등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세상과 등지기 1주일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전한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돼 버렸다.

투서는 보다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 사람의 목숨을 이유 없이 앗아가는 '독'으로 변할 수 있다. 다시는 투서로 인해 비극적인 일이 과학기술계에 없길 바랄 뿐이다. 이참에 투서와 관련한 제도 전반의 개선과 올바른 투서 문화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융합연구의 꽃'을 연구단에서 피워보겠다는 정 박사의 꿈이 하늘에서라도 이뤄졌으면 좋겠다.

대전=이준기기자 bong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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