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규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교수
하선규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교수


감정의 모호성, 주관성, 위험성, 그리고 미적 경험의 중요성

인간에게 감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흔히 우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감정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적절히 제어하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다. 종종 그 해악은 걷잡을 수 없이 치명적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감정은 삶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감정적인 소통과 교감이 없는 가족과 친구 관계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심금'을 울리는 음악과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를 원한다. 우리는 밋밋한 찻집보다는 '분위기' 있는 카페를 더 좋아한다. 또 우리는 감정에 둔한 사람보다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꺼려하는 단조로움이나 지루함은 사실상, 감정이 사라진 것, 생생함을 잃은 것과 같은 뜻이다. 그 뿐이 아니다. 감정은 인간의 삶과 문화가 도달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칭송된다. 특히 사랑의 감정이 그러하다. 불교의 '박애', 유교의 '측은지심', 기독교의 '이웃사랑'에서 보듯, 숭고한 종교적 가치도 사랑의 감정과 그 실천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감정은 근본적으로 양날의 칼인가. 인간은 이 양날의 칼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흔히 감정의 구분을 택한다. 희, 로, 애, 락, 공포, 수치심 등 여섯 가지를 대표적인 감정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들 각각이 워낙 다른 감정들이기에 서로 혼동될 위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감정만큼 그 실체가 모호하고 다의적인 것도 없다. 인간의 감정적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를 떠올려보라. feeling, emotion, sentiment, affect, passion, mood, atmosphere 등 얼마나 다양한가.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느낌, 감정, 정서, 정조, 감화, 정동, 열정, 기분, 분위기, 정취 등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말은 너무나 다양하며 이들 사이의 경계선도 불분명하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들은 느낌, 정서, 정조, 기분, 분위기 사이를 모호하게 넘나드는 애매하고 복합적인 느낌이다.

이렇듯 모호하고 복합적인 감정은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살아있음'의 신호라는 데에 있다. 감정을 떠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하든 안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감정은 이미 나를 감싸고 있으며, 나의 몸과 마음을 이끌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감정은 개별자의 주관성(subjectivity)이 생생하게 부각되는 통로이다. 라틴어 격언 "Tua res agitur!"(이것이 바로 네 문제다!)은 바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감정이 없다면 삶의 모든 사태와 문제, 모든 계획과 의도는 그 소중함과 절실함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아니, 감정이 없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사실 조차 모든 현실감과 진실함을 잃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감정은 인간이 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일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일상적인 삶의 경험은 결코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관찰하고 측정하듯이 느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감정적 상태에 있는가, 어떤 감정적 태도를 취하는가가 우리의 지각과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감정 상태가 지각이나 인식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각이 따로 있고, 거기에 감정적 색채가 덧붙여질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요컨대 우리의 지각과 인식은 거의 모두 감정에 의해 시작되고, 감정에 의해 인도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의 두 가지 특징으로부터 세 번째 특징이 자연스럽게 추론될 수 있다. 감정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상황과 타인에 대해 '열려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준다. 이때 감정의 '대상'과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혼동해선 안 된다. 감정은 폐쇄된 영혼의 비밀스런 특질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어떤 인상과 상황에 '연루되어 있음', 어떤 분위기적인 힘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한다. 감정을 느끼는 인간은 특정한 인상과 상황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개방한 상태에 있다. 그는 이들이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연상과 암시력, 리듬과 방향성을 자신의 몸의 느낌 속에, 자신의 존재 상태 속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열려 있음과 받아들임은 물론, 언제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이 과정은 나의 개체적 독립성과 자율성을 앗아가기도 한다. 감정의 힘이 나의 모든 자율적인 지각과 사유의 가능성을 제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세 가지 근본적인 특징들은 미적 경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미적 경험은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공감과 참여를 바탕으로 한 경험이다. 그것은 자연과 예술의 새로운 인상에 대해서 나 자신을 감정적으로 열고 다가가는 경험이다. 그것은 자연과 예술이 보여주는 구체적 이미지들과 이들의 조화로운 완성도를 공감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려는 경험이다. 나아가 미적 경험은 나의 주관성이 깨어나고 흔들리는 경험이며, 나와 내 삶 사이에,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정서적인 간극을 유희적으로 실험해보는 과정이다. 감정의 모호성, 주관성, 위험성을 이해하고 연습하는 데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정이 있을까. 탁월한 예술작품들 하나하나는 모두 감정에 관한 진실을 깊이 있게 체험하고 배우도록 해주는 삶의 교사들이다.

하선규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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