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공업화' 과제해결 기대속 출범
산업계와 연계 기술연구 … '경제성장' 첨병
50년간 사회경제적 가치 '595조원' 창출


서울 홍릉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 초창기(위쪽)와 현재 항공사진 모습. KIST 본원뿐만 아니라 고층아파트 등이 늘어선 서울의 변화된 모습이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과 함께 걸어온  KIST의 50년 세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1966년 설립된 KIST는 지금까지 595조원(2012년 기준)이라는 사회·경제적 가치를 창출했고, KIST를 모태로 15개의 출연연구소가 출범하는 등 현재와 같은 국가 연구개발(R&D) 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KIST 제공
서울 홍릉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 초창기(위쪽)와 현재 항공사진 모습. KIST 본원뿐만 아니라 고층아파트 등이 늘어선 서울의 변화된 모습이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과 함께 걸어온 KIST의 50년 세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1966년 설립된 KIST는 지금까지 595조원(2012년 기준)이라는 사회·경제적 가치를 창출했고, KIST를 모태로 15개의 출연연구소가 출범하는 등 현재와 같은 국가 연구개발(R&D) 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KIST 제공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1부> (1)'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 KIST의 탄생


대한민국이 전쟁의 포화로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초고속 성장을 이루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힘은 과학기술에서 나왔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후진국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댈 것은 국민의 우수한 두뇌뿐이었다. 밀가루 한 포대, 쌀 한 가마가 아쉬웠던 시절, 국민들이 목숨을 걸어 받아온 베트남전 파병 대가는 과학기술 연구소 설립에 투자됐다. 지금 당장 따뜻한 밥 대신 후세에 '잘 사는 대한민국'을 물려주고자 했던 앞선 이들의 희생은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을 만드는 초석이 됐다. 올해는 1966년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종합연구기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 50돌을 맞이하며, 이듬해는 현대 과학기술 정책의 출발점인 과학기술처가 출범한 지 50년이 된다. 그동안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기술 개발에 목숨을 걸었던 과학기술인들의 열정과 성실함은 반도체와 ICT,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세계적으로 강한 산업을 일궈냈다. 이제 이들에게는 선진국의 기술을 쫓는 대신 선두에서 새로운 혁신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놓여있다. 디지털타임스는 지난 50년 국내 과학기술의 성과를 돌이켜 보고, 지나온 길에서 앞으로 50년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연중기획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을 시작한다. 그 1부로 국내 과학기술 체계의 출발점인 KIST 설립의 의미와 성과를 살펴보는 기획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와 함께 '사진으로 보는 과학기술 50년' 연재를 통해 지난 50년 과학기술 현장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생생히 전달한다.


"동양철학에는 '정부가 국민에게 고기를 준다'는 사고방식과 '정부가 국민에게 낚싯대를 줘서 고기를 잡게 한다'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동양에서는 역시 후자가 더 좋다."

1965년 7월 9일, 한국의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에서 온 도널드 호닉 박사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받아온 미국의 원조가 '고기'였다면, 연구소 설립은 '낚싯대'가 될 것이란 얘기였다.

1965년 5월 미국을 찾은 박 대통령에게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공업기술과 응용과학을 담당하는 연구소 설립을 제안한다. 이어 연구소 설립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고문 호닉 박사는 두 나라의 재정지원으로 비영리의 자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는 민간기관 형태의 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호닉보고서'를 제출한다. 이를 통해 1966년 설립된 국민을 먹여 살릴 '낚싯대'가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다.

KIST는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구소로 성장해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KIST는 595조원(2012년 기준)이라는 사회·경제적 가치를 창출했고, KIST를 모태로 15개의 출연연구소가 출범해 본격적인 국가 연구개발(R&D)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KIST의 성과는 단순히 수치로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 그 파급효과가 더 컸다. 밀가루 한 포대가 절박한 시대에 과학기술 연구가 제대로 형태를 갖춰 뿌리를 내리고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KIST 설립은 우리나라 근대 과학기술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공업화' 과제 위해 종합연구기관 설립 절실=국내에서 국가연구기관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은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이 한창이었다. 당시 먹고 사는 것이 급했던 우리나라의 기본 산업은 농업이었고, 정부도 예산 대부분을 농업 발전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국토의 80%가 산인 한국이 농업으로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것이 애초에 무리였다. 몇 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지 않자 정부는 공업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이 성공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 필요한 기술을 선정해 도입하고, 우리 식으로 소화해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연구기관의 설립이 절실했다.

KIST 설립 이전에도 국내에 연구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며 1964년 한국에는 국공립연구기관, 대학과 민간기업부설연구기관의 형태로 86개의 연구기관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대학과 민간 연구소의 연구활동은 극히 미약했고, 대부분의 연구활동이 이뤄지던 국공립연구기관 역시 분석실험이나 조사 등 행정지원을 위주로 하는 기술연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나마 연구환경이 좋았던 연구기관은 원자력연구소와 국방과학연구소였지만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산업계와 밀착해 'R&D' 뿌리 내리다=KIST는 규모뿐만 아니라 내부 운영 시스템 측면에서 이전에 존재하던 연구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KIST 초대 원장인 최형섭 박사의 표현에 따르면 KIST는 정부에서 돈은 나오되 완전히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캐나다 국가연구위원회(NRC), 자기 나라에 필요한 연구만 중점적으로 수행하는 호주 연방과학원(CSIRO), 연·학 협동체제를 제대로 굳힌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기초에서 응용연구까지 자율적으로 하되 그 결과를 기업화하는 일본의 이화학연구소(RIKEN) 등의 장점만을 따온 방식으로 출발했다. 여기 언급된 연구소들은 대부분 지금도 국내 연구기관들의 '롤모델'로 언급되고 있는 곳들이다.

KIST 설립 당시 키워드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산업계와 연계를 하도록 할 것인가'였다. 당시 KIST의 설립 목적은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학문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산업발전, 특히 공업화와 관련한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KIST는 처음부터 먼저 연구를 한 뒤 사용자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미리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과제를 물색하고, 그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돈을 받고 같이 연구하는 방식을 따랐다. 설립 초기부터 KIST 연구원들은 영업부와 판매부를 두고 연구소를 소개하는 슬라이드와 책자를 만들어 백방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팔러 다녔다. 처음부터 이런 방식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기업가들의 의식 수준은 '일본에서 기능공 몇 사람을 데려오면 되지 연구는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KIST의 연구로 직접적인 성과를 내는 기업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1968년 폴리에스테르 방사회사인 삼덕물산이 20만달러를 들여 설치한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 장치를 공급한 외국 회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25만달러가 더 들고 6개월 뒤에나 가능하다고 얘기했다. 문제 해결을 요청을 받은 KIST는 방직연구술, 기계연구실, 전자연구실 연구원들이 팀을 짜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기능을 정상화시켰다. 더구나 장치를 개조해 성능을 높여 망해가던 회사를 다시 살리자 '사장이 KIST 앞을 지날 때마다 절을 했다'는 후문이 돌 정도였다.

이런 활약상이 전해지면서 KIST는 산업계로부터 수많은 수탁연구의뢰를 받게 된다. 설립 초기 연평균 70여 건이던 연구용역 건수는 1970년대 전반에는 188건, 후반에는 210여 건으로 3배로 늘었다. 폐결핵 치료제 '에탐부톨'의 국산화와 전자식 교환기 장치 개발, 포항제철의 대형 일관제철소 건설과 운영의 문제점 해결 등 걸출한 연구성과도 이어졌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R&D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기술개발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와 방법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KIST가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미친 중대한 영향이다.

◇과학기술자가 인정받는 시대를 열다=KIST 설립 당시 두 번째 고민은 '어떻게 유능한 사람을 불러 모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계약연구를 위해선 유능하고 경험 있는 연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KIST는 주로 해외에 있는 한인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했다. 휴전 이후 1950년대에 유학 간 사람들을 다시 한국으로 불러오는 것 목표였다. KIST는 유치 과학자들에게 가능한 한 연구의 자율성과 생활의 안정성을 확립해 주고자 했다. 원내 아파트를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해 혜택을 줬다. 임금은 국내 대학교수의 2∼3배 수준으로 책정해 KIST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했다.

이런 아낌없는 투자는 과학기술자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게 해준 계기가 됐다. 당시 KIST로 오기로 한 연구자들은 일간지에 일일이 소개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해외에서 활동 중인 과학자들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국가의 위상이 변하고 있다는 신호가 됐다. 연구자에 대한 남다른 처우와 최고의 연구환경, 연구자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자 KIST 연구자들은 강한 책임감과 자부심 속에서 의지를 갖고 연구에 매진, KIST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로 불리며 빠른 시간에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소로 성장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연구기관과 대학으로 해외 두뇌 유치가 파급돼 과학기술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각 분야의 핵심적인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율적인 연구환경을 만들다=KIST 설립의 또 다른 고민은 '어떻게 연구자들의 자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특별법으로 제정된 'KIST 육성법'에서는 정부에서 주는 자금이 '출연금'이어야 함을 명시했다. 출연금이란 일종의 기부금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금을 준다고 정부가 연구활동에 간섭하는 일을 막기 위한 발상이었다. 그러한 취지 아래 KIST는 이사회가 주축이 되는 독립 재단법인체로 출범해 자주적인 운영을 했다. 이렇게 연구소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인체 연구기관의 설립, 출연금 제도에 의한 재정적 지원, 연구기관에 대한 국유재산의 무상 양여의 가능성, 운영기금 설치, 독립회계제도, 연구원 임용계약제 등 여러 제도를 담은 KIST 육성법은 이후 우리나라 연구기관의 설립과 개편, 운영에 직접 반영돼 근대화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또 현재 운영되고 있는 생명과학연구원, 해양과학기술원, 기계연구원, 화학연구원, 전자통신연구원 등 특수전문연구기관들은 KIST에서 분화 발전된 연구기관으로, 조직과 운영은 KIST 형태를 모델로 각자의 특성에 맞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KIST 50년, 미래 50년에 대한 길을 묻다=KIST 설립 이후 5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과학기술 경쟁력 6위, 기술 경쟁력 8위, 경제 규모 11위의 국가로 성장했다. 선진국을 따라가기 바빴던 지난 50년을 지나 이제는 세계 무대를 선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과제가 눈 앞에 놓였다. 과학기술자들의 역할도 추격연구에서 선도연구로, 기초원천 연구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창의적 연구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발표된 '정부 R&D 혁신방안'의 문제의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응용·개발연구의 수요자 중심 개선, 연구자들이 연구하기 좋은 환경 조성 등 KIST 설립 당시 고민은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KIST를 비롯한 대한민국 과학기술계가 풀어야 할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남도영기자 namd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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