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약 기준으로 신약가격 결정
재정부담에 많이 팔리면 가격↓
국내 약값이 해외 공급가에 영향
제약사 세계시장 수출에 '걸림돌'

잘 팔릴수록 가격을 내리고, 값싼 약을 기준 삼아 신약 가격을 책정하는 국내 약가 정책이 제약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작년 한미약품 8조 기술수출로 제약 수출 기대감이 커진 상황이지만 해외 공급 가격의 기준이 되는 국내 약값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돼 제약사들의 수출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10일 전문가들과 제약업계에 따르면 일본은 의약품의 효과가 허가 당시보다 좋다고 증명되면 약 가치가 높아졌다고 보고 최대 5% 약값을 가산해 주지만, 국내는 '사용량 약가 연동제'를 적용, 효능을 추가로 인정받아 급여가 확대되면 약이 많이 팔려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생긴다는 이유로 약값을 되려 떨어뜨린다.

또 일본은 혁신적 의약품의 가격을 정할 때 건강보험에 등재된 지 10년 미만 된 신약과 비교하고, 신규성이 떨어지는 의약품도 최대 15년 이내에 등재된 의약품과 비교해 약값을 책정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등재된 지 수십 년이 지나 약값이 크게 차이 나는 품목도 신약 가격 산정 시 기준으로 이용해 신약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특히 국산 신약 수출 시 해외 약값은 국내 가격을 참고해 정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에서 저평가되다 보니 글로벌 시장 진출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업계는 지적한다.

실제로 최근 약값이 정해진 동아ST의 항생제 '시벡스트로주200㎎(성분명 테디졸리드)'은 지난 1일 상한가 12만8230원에 등재됐는데, 비교 약제는 이미 특허만료로 가격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한국화이자제약의 '자이복스(성분명 리네졸리드)'로 설정됐다. 자이복스는 2014년 7월 특허만료와 제네릭(복제약) 출시로 원 가격의 70%로 약값이 떨어졌고, 지난해 7월 기존의 53.55% 수준으로 다시 낮아진 바 있다.

보령제약의 자체 개발 고혈압 신약 '카나브(성분명 피마사르탄)'는 멕시코 진출 1년 만에 지난해 현지 순환기내과의 같은 계열 약물 중 처방 1위에 오르며 효능과 안전성을 인정받았지만, 출시 초기에는 터키 수출이 값싼 국내 약값으로 인해 무산되는 경험을 겪었다.

제약업계는 정부가 '제2 한미약품' 성공사례를 만들자며 제약업계를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건강보험 재정 안정만 추구하는 약가정책을 펼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 턱없이 낮게 정해진 약값이 기업들의 글로벌 수출에 실질적인 독이 되고, 나아가 기업들의 신약 R&D 의지마저 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박지만 한국제약협회 보험정책실 과장은 제약협회 정책보고서에서 "지속적인 R&D 투자로 개발된 제품이 적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나아가 세계시장에 진출할 여력을 키울 수 있는 현명한 약가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독일·프랑스 등 제약 선진국은 기업의 정책 수용성을 고려한 다양한 충격완화 장치를 두고 예측 가능한 정책을 펴는 한편 충분한 의견개진 절차를 마련해 수십 년을 내다본 제도를 뒀기 때문에 산업이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다.

반면, 호주·대만·우리나라는 보험 재정 안정화가 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약제비가 늘어나는 조짐이 보이면 바로 새로운 약가인하 정책을 추진해왔다는 것.

실제로 세계 제약시장에서 일본은 10.8%, 독일은 5.2%, 프랑스는 4.4%를 차지하지만, 호주와 한국은 1%, 대만은 0.5%에 그치고 있다. 세계 50대 제약기업을 살펴봐도 일본은 다케다제약, 다이이찌산쿄, 아스텔라스제약, 독일은 베링거인겔하임, 바이엘, 프레지니우스, 프랑스는 사노피와 세르비에가 있는 반면, 호주에 바이오 업체 CSL이 있을 뿐 대만과 한국에는 글로벌 50대 제약사가 전무한 상황이다.

박지만 과장은 "단기적인 임시방편 정책이 지속되면 제약산업은 성장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제2의 제약 성공사례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며 "제약산업이 미래성장동력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기업이 R&D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지섭기자 cloud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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